- ‘뜨거운 피’ 천명관 “소설가→감독 데뷔, 아이러니한 인생 경험 중이죠” [인터뷰]
- 입력 2022. 03.22. 07:00:00
- [셀럽미디어 전예슬 기자] “신인 감독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게 ‘인생 재밌다’라는 기분이 들어요. 이런 삶으로 한 시절을 보내게 됐구나. 소설가로 살 때도 ‘재밌다’라고 느꼈거든요. 인생의 아이러니를 경험하는 중이에요. 하하.”
'뜨거운 피' 천명관 감독 인터뷰
끝없는 도전이다. 직장생활을 하다 꿈을 이루기 위해 충무로 입성. 글을 쓰며 소설가로 산 15년.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잡은 메가폰. 천명관 감독의 열정 가득한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다.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계에 입문한 천명관 감독은 2004년 베스트셀러 작품 ‘고래’로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하며 ‘문학계 혜성’으로 떠올랐다. 이후 집필한 ‘고령화 가족’이 영화화되며 ‘스타작가’로 이름을 알렸다. 그런 그에게 ‘뜨거운 피’의 원작자 김언수 작가가 연출을 권유, 감독으로 첫 발을 내딛게 됐다.
“김언수 작가가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틈틈이 원고도 보고, 이야기를 나눴어요. 김 작가가 부산의 서쪽, 낙후된 지역 출신인데 그쪽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소설로 써보는 게 어떠냐, 그게 진짜 이야기가 아니겠냐’라고 권했죠. 소설로 나온 후 이 이야기를 가장 잘 이해하고, 영화적으로 구현한다면 그 적임자는 형이 아니겠냐고 연출을 제안했어요. 뜻밖의 제안이라 놀랐어요. 제가 한편도 영화를 만들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저는 그 당시만 해도 다른 소설을 쓰고 있었어요.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라는 소설이었는데 저는 이걸로 감독 데뷔를 하려고 했어요. 그럼에도 감독을 맡게 된 결정적 이유는 너무 재밌어서였어요. 이 이야기 안에는 제가 좋아하는 요소들도 많았고, 제가 생각하는 건달의 이야기가 잘 녹아있었죠. 다른 조폭 영화는 검은 양복을 입고, 몰려다니며 검은 승용차 등을 떠오르게 하잖아요. 그걸 보면서 ‘저 사람들은 뭘 먹고 살지?’란 공허함을 느꼈어요. 구체적이지 않고, 현실적인 이유가 아니라 다른 이유들로 싸우곤 했거든요. 저는 돈으로 인해 벌어지는 이야기가 진짜라고 생각했어요. 소설 속에는 그런 요소들이 있었죠. 그래서 연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뜨거운 피’는 1993년, 더 나쁜 놈만이 살아남는 곳 부산 변두리 포구 ‘구암’의 실세 희수와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밑바닥 건달들의 치열한 생존 싸움을 그린 영화다. 실제 부산 출신이자 앞서 다양한 작품을 통해 맛깔 나는 사투리 연기를 선보였던 정우가 극중 건달 희수 역을 맡았다.
“정우의 고등학교 이야기가 ‘바람’으로도 나왔잖아요. 본인도 희수 역할을 굉장히 하고 싶어 했어요. 캐스팅 전, 그 당시 정우 씨는 곱상한 이미지였어요. 코믹하고, 밝고, 명랑한 이미지가 있었죠. 건달에 대해 저도 선입견이 있다 보니 ‘정우 씨가 건달 역할을?’이란 의문이 있었어요. 몇 번 만나보고, 다른 자료들도 보면서 어느 순간 느낌이 왔죠. 이 배우라면 충분히 희수라는 인물을 구현할 수 있겠구나 하는. 어떻게 보면 우락부락한 건달과 다른, 예리하고 리얼하면서 어딘가 쓸쓸한 건달의 모습을 구현할 것 같았어요.”
정우 외, 실제 부산, 양산 등 경상도 출신인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 최무성, 지승현, 이홍내 등 배우들은 각자 맡은 캐릭터에 완벽하게 스며들며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저는 부산 사람이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표준말을 쓰다 보니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사투리 연출이었죠. 어떤 연기를 배우와 만들어내는가가 가장 중요했어요. 연기는 대사를 통해 드러나는데 사투리의 뉘앙스를 모르기 때문에 확신이 없었죠. 그 점이 매우 어려웠어요. 영화 캐릭터들은 배우들이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옆에서 지켜보며 논의했고, 배우들이 각자 잘 맞는 스타일을 찾도록 도와주려 했죠. 김갑수 선배님 빼놓고 다 경상도 출신이었어요. 네이티브 스피커라 자연스러운 사투리 연기가 나온 것 같아요.”
원작이 갖고 있는 강렬한 스토리와 박진감 넘치는 분위기에 천명관 감독의 섬세한 표현력이 더해졌다. 특히 후반부 등장하는 정우의 내레이션은 서정적인 느낌을 더해 근래 본 적 없는 웰메이드 작품을 탄생케 한다.
“마지막 장면에 고민이 많았어요. 희수가 배후에서 모든 걸 정리하고 영화가 끝날 수도 있었죠. 그래서 뒷 이야기가 군더더기처럼 느껴질 수 있어요. 내레이션은 저의 노파심이라고 할까요? 이 영화의 주제를 조금 더 관객들에게 친절하게 전달해주는 측면과 희수의 목소리를 통해 마무리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내레이션 부분이 어떻게 보면 과장도 있어요. ‘건달이 이런 이야기를 해?’라고 할 정도로 문학적인 요소도 있죠. 고민이 많았는데 결국 넣게 됐어요.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설 때 여운을 가졌으면 해서 넣은 거죠. 그게 좋은 선택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스토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성 캐릭터의 등장, 활용에 대해 ‘아쉽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역할을 위해 희생되고, 성적대상으로 소비해버리기에 과거 만들어진 조폭 영화에 벗어나지 않는다는 혹평을 받은 것이다.
“이 부분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원작에는 여성 캐릭터가 많이 등장하지 않아요. 옛날에 소위 ‘알탕 영화’(남성 배우만 대거 출연하는 영화를 뜻하는 말)라고 하는데 저희 영화도 그 범주에 속해있죠. 여성 캐릭터는 조연, 희생자이거나 각성의 도구로 쓰여요. 그 점에 있어서 한계를 인정하죠. 이 영화 안에서 여성 역할은 주인공의 행위가 강하거나, 주체적이고, 남성과의 관계가 소비적이지 않은 것들에 대해 고민했어요. ‘90년대 부산의 건달들은 어땠을까, 그들의 삶은 어땠을까’ 생각했을 때 개연성이나 시대성이 이 영화에서 조금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이것이 제가 가진 여성관은 아니에요. 그러나 그런 것들이 불편했다면 그 점에 대해 변명하지는 않아요. 다른 영화들을 통해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조금씩 더 채워나가며 염두하겠습니다.”
천명관 감독은 느와르 장르와 캐릭터, 액션, 분위기 대신 사람과 삶 자체 ‘날 것 그대로’를 ‘뜨거운 피’에 담아냈다. 장편 소설을 2시간 이내의 러닝타임으로 압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터.
“제일 중요한 건 2시간이라는 듀레이션이었어요. 영화 장르의 형식이라는 것을 하면서 뼈저리게 깨달았죠. 그 점이 매우 힘들었어요. 저도 소설을 쓰면 길게 쓰는 편이라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고, 주인공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 과거, 배경 등을 설명하거든요. 그렇게 하면 영화는 4시간 쯤 걸려요. 시나리오 쓸 때는 그 점을 엄격하게 염두 하진 않아요. 그렇다 보니 현장 편집본이 3시간 반이 나오더라고요. 2시간짜리로 작업하며 뼈저리게 느꼈어요. 영화라는 건 2시간의 형식을 가진 장르고, 그 점이 가장 결정적인 것이구나를 느꼈죠. 다음에 만들 때는 그 점을 엄격하게 인지하고 하지 않으면 힘들겠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천명관 감독을 감독의 길로 이끈 건 ‘운명’이었을까. 그의 도전에는 한계가 없어 보인다. 감독으로서 또 다른 역량을 보여줄 행보가 궁금증을 더한다.
“충무로에 처음 들어간 건 서른 살쯤이었어요. 그것도 매우 늦은 나이었죠. 직장생활을 하다가 충무로에 들어갔거든요. 그때 나이가 많다보니 연출부 생활을 할 수 없었어요. 영화사에서 직원으로 시작해 제작 일도 하면서 시나리오를 썼어요. 연출의 꿈을 갖게 되고, 시나리오가 10편쯤 됐는데 다 실패했죠. 충무로를 떠나 소설을 쓰게 됐어요. 소설가로 15년을 살다가 감독을 하게 됐죠. ‘뜨거운 피’ 연출을 하게 될 때만 해도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신인 감독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게 ‘인생 재밌다’라는 기분이 드네요. 소설가로 살 때도 ‘재밌다’라고 느꼈거든요. 인생의 아이러니를 경험하는 중이에요. 하하. 다음 작품은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가 될 것 같아요. 시나리오를 완성하면 캐스팅 작업을 하려고 해요. ‘고래’나 ‘나의 삼촌 부르스 리’는 제가 쓴 작품을 다른 감독, 작가들이 만들고 쓴 것을 보고 싶어요. 저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셀럽미디어 전예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키다리스튜디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