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가족’, 가족의 유물론 Vs 관념론
- 입력 2022. 05.18. 08:00:00
- [유진모 칼럼] ‘어느 가족’(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2018)은 제 71회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가장 고레에다 감독다운 영화’라고 평가받고 있다. 오사무(릴리 프랭키), 노부요(안도 사쿠라), 아키(마츠오카 마유), 쇼타(죠 카이리)는 모두 할머니 하츠에(키키 키린)의 성 시바타를 쓰는 한 가족이다.
'어느 가족'
오사무는 건축 현장의 일용직 노동자이고, 노부요는 세탁 공장의 비정규직 직원이며, 아키는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 일한다. 부부는 돈을 잘 벌면서도 생활비를 안 내는 아키에게 불만이고, 아키는 부부가 할머니에게 빌붙어 산다고 비난한다. 노부요는 유리에게 각별한 애정을 느끼고 정성껏 돌본다.
가족은 뉴스에서 유리가 행방불명된 쥬리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녀 스스로 집에 돌아가길 거부하자 린으로 개명해 완전한 식구로 받아들인다. 오사무가 다리 부상으로 돈을 못 버는 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노부요가 해고된다. 가족은 모처럼 해수욕장 놀러 갔다 오고, 다음날 하츠에가 눈을 감는다.
장례비가 없는 가족은 그녀를 집 마당에 묻는다. 쇼타가 절도 후 도주하다 다리가 부러져 입원하고, 경찰이 가족을 수사하는 가운데 사체 유기, 유괴 등의 범죄를 밝혀내는데. 6명의 가족은 피 한 방울 안 섞였지만 끈끈하다. 하츠에는 부부의 의중을 잘 알고 있지만 외롭기 때문에 그들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오사무와 내연 관계였기에 남편이 떠나가 새 여자와 결혼했다. 그러자 오사무가 전남편을 죽였고, 하츠에는 일종의 위자료로써 연금을 받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뻔뻔하게 기일마다 후처의 아들의 집에 들러 그로부터 적지 않은 용돈을 받아 왔다. 더 놀라운 건 아키가 그 아들의 큰딸이라는 점.
노부요도 아키처럼 유흥가 출신으로 오사무를 손님으로서 만나 결혼했다. 그녀는 불임이었기에 파친코 주차장의 한 승용차 안에 있던 쇼타를 유괴했다. 린의 엄마는 “원하지 않는 임신이었다.”라고 남편에게 외친다. 엄마는 린에게 새 옷을 사 주고 나면 으레 폭행을 휘둘렀고, 심지어 불로 지지기도 했다.
노부요가 세탁 공장에서 다리미로 인해 입은 흉터와 린의 흉터는 똑같다. 쇼타는 린에게 도둑질을 가르친다. 그날도 문구점에서 도둑질을 하자 주인 할아버지는 쇼타를 불러 젤리를 두 개 주며 “동생에게는 그 짓을 시키지 마.”라고 점잖게 타이른다. 과연 이 가족은 정상인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본, 더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의 거의 모든 국가의 현실을 반영한다. 세 명은 특별히 배운 게 없어 비정규직인 데다 오사무는 늙었다. 막노동, 세탁 비정규직, 유사 성매매 등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직업이 아니다. 언제라도 해고될 수 있다. 오사무는 업무 중 부상을 입었지만 산업 재해 처리가 안 된다.
이 가족이 보편적인 시선을 기준으로 부당하게 살아가는 건 그들이 패악해서가 아니라 이 사회가 불공평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초등학교에 다녀야 할 쇼타는 “집에서 공부할 수 없는 애들이 학교에 가는 것.”이라고 한다. 오사무는 경찰에게 “아이들에게 도둑질밖에 가르칠 게 없었다.”라고 진술한다.
“아이에겐 (친)엄마가 필요하다.”라는 경찰의 말에 노부요는 “그건 (친)엄마가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다. 낳으면 다 엄마인가? 난 누군가 버린 것을 주운 것일 뿐.”이라고 반발한다. 오사무는 쇼타에게 “아빠라고 불러.”라고 주문하지만 쇼타는 계속 거부하다가 마지막 시퀀스에서 혼잣말로 불러 본다.
그렇다. 이 영화는 가족에 대한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결, 혹은 어느 것이 옳은지에 대한 질문이다. 통상적으로 가족이란 비친척 관계의 남녀가 만나 자식을 낳고 구성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시바타 가족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어떤 연결 고리도 없고, 심지어 범죄 행위를 통해 구성되었고 유지된다.
그렇다면 입양 제도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가슴으로 낳았다.’라는 수사적 표현은? 자본주의는 유물론과 ‘절친’인 데다 황금만능주의를 최고의 이데올로기로 삼는다. 이 체제 아래에서 가족의 정체성은 유물론으로 매우 기울어져 있다.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은 그런 사회와 유물론적 인식론을 힐난한다.
날 좋은 어느 밤 집 근처에서 불꽃놀이 축제가 벌어진다. 하츠에는 과거 축제에 참석했던 경험담을 들려주고, 카메라는 부감으로 지붕과 마루를 잡는다. 오사무는 “불꽃놀이 소리 좀 들어 봐.”라고 들떠한다. “불꽃놀이 좀 보아 봐.”가 아니라 “불꽃놀이 소리 좀 들어 봐.”이다. 이 얼마나 관념론적인가!
노부요는 “피가 안 이어져서 좋은 점도 있다.”라고 말한다. 굉장히 냉소적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매우 인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혈족 이상으로 믿고 사랑하잖아.’라는 자긍심이다. 이는 구조주의와 해체주의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가족의 중요성을 알지만 사회는 점점 해체로 나아가고 있다. 개인주의로.
취업 외에도 아동 폭력 문제와 더불어 삶과 죽음을 거론한다. 저녁에 린의 치아 하나가 빠지고, 다음날 아침 하츠에가 눈을 감는다. 이렇듯 세상은 탄생과 소멸, 발전과 퇴보 등의 이항대립이 동시에 진행되기 마련이다. 결국 감독은 스위미(작은 물고기 무리가 큰 물고기를 이기는 것)라는 키워드를 통해 구조주의의 손을 들어 준다. 고레에다의 걸작 중의 걸작.
[유진모 칼럼 ybacchu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