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를 판 남자’, 매 쇼트가 예술인 아트 스릴러
입력 2022. 08.16. 10:19:31

‘피부를 판 남자’

[유진모 칼럼] ‘피부를 판 남자’(2020)는 튀니지 출신 여자 감독 카우타르 벤 하니야의 탐미적 연출 솜씨가 유려하게 펼쳐지는 아트 스릴러이다. 매 쇼트가 한 폭의 그림이자 전위 예술이다. 2011년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이 시작된 시리아. 청년 샘은 아비르를 사랑하지만 신분 격차에 가로막힌다.

샘은 혁명을 외친 이유로 경찰을 피해 레바논으로 도망간다. 그는 1년 후 고급 전시회에서 유명 화가 제프리의 비서 소라야(모니카 벨루치)를 통해 제프리를 만나고 큰돈과 인기를 조건으로 등을 캔버스로써 계약하자는 제안을 받는다. 그동안 아비르는 부모의 강권에 의해 주벨기에 시리아 대사관 직원 지야드와 결혼했다.

샘은 아비르와의 영상 통화에서 자신도 제프리와 함께 벨기에로 간다고 자랑한 뒤 브뤼셀 정착을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한다. 결국 등에 제프리의 타투를 새긴 후 왕립 미술관에 전시되고, 좋은 반응을 얻는다. 지야드는 아비르를 왕립 미술관에 데려가고, 전시된 샘을 본 아비르는 “왜 거짓말했느냐?”라고 따지며 실망하는데.

튀니지는 시리아와 레바논처럼 한때 프랑스 식민지였다 독립한 이슬람 국가이다. 시리아와 레바논은 그때 분리된 한 민족이지만 사이는 썩 좋지 못하다. 감독은 당연히 시리아는 물론 프랑스 문화와 가까운 벨기에에 관심이 많을 터. 나름대로 스릴도 있고 반전의 재미도 주는데 특히 공간과 미장센이 압도적이다!

하얀 전시장에 화이트 셔츠, 블랙 팬츠, 블랙 넥타이를 차려입은 두 명의 남자가 의미심장한 작품을 벽에 내거는 인트로와 아웃트로의 수미상관부터 이 작품의 예술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웅변은 다양한데 첫 번째는 자유에 대한 질문이다. 제프리의 “나는 메피스토펠레스 같다.”라는 대사는 노골적이다.

샘은 자유롭게 살고자 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제프리는 예술가(벨기에 출신)의 외피를 두른 자본주의자(미국 국적)이다. 그의 영혼이 예술적이든, 그런 척하는 것이든 현실적으로 그는 갑부이자, 스타이다. 샘의 등이 경매장에서 약 60억 원을 호가할 정도이니 그가 얼마나 부유한 예술가인지 알 수 있다.

요즘 그림은 예술적 취향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재테크 수단으로 많이 활용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 쌍의 졸부 부부가 단지 남에게 돋보이려는 이유로 샘의 등을 사는 시퀀스가 바로 그런 점에 대한 비아냥거림이다. 예술이 예술성으로 소비되는 게 아니라 부와 과시의 수단으로 전락한 자본주의의 현실을 꼬집기!


근세, 근대의 예술가들은 대부분 가난, 고독, 병마 등에 시달리다가 불행한 생을 마감했다. 반 고흐는 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해 평생 동생 테오에게 생활비를 얻어 썼다. 현대에도 사후에야 인정을 받는 예술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생전에 스타덤에 오르고 사후에 작품의 가격이 더 오른다는 정도이다.

이런 모든 것이 마치 연예계처럼 시스템화, 산업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정도이다. 해당 예술가나 그 주변의 스태프가 잘못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 구조가 그토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샘의 등에 뾰루지가 생기자 제프리는 프로답지 못하다며 소라야를 문책한다. 예술가의 비서로서 작품(상품) 관리에 소홀했다는 사업적 책임론.

샘이 수술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전시실에는 ‘이 작품은 복원 중입니다.’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돈과 자유를 위해 몸을 팔았지만 오히려 억류당한 파우스트인 샘은 피그말리온의 전도로도 비유된다. 그리스 신화 속 피그말리온은 키프로스의 조각가인데 성적으로 문란한 키프로스의 여인들에게 혐오감을 느껴 그녀들을 멀리한다.

조각에만 몰두하던 그는 드디어 이상적인 여인의 조각상을 만들었고, 그걸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간절히 기도한 끝에 조각상이 진짜 여인 갈라테이아로 변신하게 되자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제프리는 “우리는 그 반대.”라고 말한다. 그가 산 사람인 샘을 물상화했다는 이야기이다.

그건 마르크스가 경고한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도구화가 아닐까? 제프리는 우아하고 고매한 척 예술적 의도를 앞장세우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돈을 벌기 위함이다. 장사꾼과 뭐가 다른가? 그럴 경우 그건 예술이라기보다는 기술이고, 전시회는 가두판매대로 전락하고 만다. 감독은 그런 예술 비즈니스를 신랄하게 비난한다.

자유를 찾아 몸(영혼)을 팔았던 샘은 결국 제 도끼에 발등이 찍혀 박물관의 하나의 미장센으로 고착된다. 자신의 등을 관람하러 온 소녀들에게 말을 붙이려 하지만 경비에게 제재를 받는, 인격을 제거당한, 그냥 하나의 작품(상품, 전시물)으로 전락한다. 왜 등인가? 바로 그런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실의 이면을 말하고자 함이다.



자유를 누리고자 자본과 타협했고, 그래서 부유함을 소수하지만 자유는 강탈당한, 또 다른 억압. 그는 자본주의에 영혼을 내어줌으로써 인격이 박탈된 하나의 박제에 불과하다. 감독은 예리하게 그의 계약이 인신매매인가, 자본주의하에서의 정당한 거래인가를 묻는다. 시리아 난민 보호 단체의 시위와 소라야의 충돌이 그것이다.

단체는 인종주의적 편견과 도식에 희생되었다며 인격 모독과 인권 유린을 주장하지만 소라야는 정당한 계약이자 예술 활동의 일환이라며 인신매매와 선을 긋는다. 이 인식론의 충돌은 우리네 옛날의 신체발부 수지부모(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을 소중하게 여김)‘론’과 타투의 불법화에 대한 반대론의 격돌을 어느 정도 떠오르게 한다.

문신은 상고시대 이래 주로 주술적이거나 비교(秘敎)적 목적이거나 혹은 특정 부족의 연대 의식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특정 집단의 타투는 주로 전술적인 목적을 띠기 마련이었다. 20세기에 특히 동양에서는 폭력 조직원 혹은 그에 상응하는 폭력배의 의미가 강했다. 특히 우리나라는 아직도 그런 개념과 의식이 두드러진다.

요즘 젊은이들은 스스럼없이 자유의사에 의해 타투를 하고, 그걸 하나의 문화나 취미로 즐긴다. 기성세대도 그런 문화를 인정해 나가는 추세이다. 그러나 샘의 케이스는 확연하게 다르다. 큰돈이 오가는 계약이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샘의 적극적인 선택에 의해-아무런 강요나 함정 없이-맺은 계약이니 세금만 제대로 내면 된다.

그러나 그건 법리적 시각일 뿐 굳이 인본주의나 실존주의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기본적 인권과 최소한의 인격에 기준할 때 도덕적 비판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오죽하면 감독이 그런 실화에서 강한 영감을 받아 이 작품을 만들었을까? 인트로를 근거로 한 예측을 비웃는 반전은 매우 따뜻한 행복감을 준다.

그래도 아직 세상은 살 만하다고! OST까지 매우 훌륭하다. 배경 상 민감한 정치 이야기도 다룰 법한데 그런 무모한 시도가 전혀 없어 푸근하다. 놀라운 사실은 남녀 주인공을 훌륭하게 연기한 야흐야 마하이니와 디아 리앤이 데뷔 신인이라는 점! 감독은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 이런 아트 무비라면 마니아가 아니어도 쉬울 듯.

[[유진모 칼럼 / 사진=영화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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