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재미+교훈 충만
입력 2022. 09.07. 09:41:46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유진모 칼럼] 제목에서부터 코미디 기운 가득한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플렉스 할그렌 감독, 2014)은 전 세계에서 600만 부 이상 팔린 요나스 요나손의 동명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코미디 영화이다. 러닝 타임이 흐를수록 의외로 스케일이 커지는, 웬만한 블록버스터 못지아니한 규모의 재미를 보장하는 한편 강한 메시지까지 전한다.

알란(로버트 구스타프슨)은 1905년 스웨덴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다. 꽤 급진적인 그의 아버지는 조국을 떠나 모스크바 광장 한 곳에 자기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콘돔을 홍보하다 처형된다. 얼마 후 어머니마저 아버지의 뒤를 따른다. 알란은 제대로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폭탄 제조에 남다른 능력을 지닌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20대 때 바람을 피우던 유부남을 폭사하게 만든 이유로 정신 병원에 수감되어 생체 실험을 받고, 남성 기능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는다. 30대에는 스페인 내전에 참전해 각 다리를 폭파하다가 우연히 파시스트 우두머리 프랑코의 목숨을 구해 줌으로써 영웅이 된다. 40대에는 미국의 원자 폭탄 비밀 프로젝트에 참가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에 공헌한 그는 트루먼, 레이건 대통령의 멘토로 활동하던 중 소련 KGB 요원 포포프에 의해 스탈린을 만난다. 하지만 자유분방한 그는 스탈린의 노여움을 사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진다. 여기서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동생 허버트와 친해진다. 형과 달리 머리가 나쁜 허버트의 엉뚱한 행동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50대에는 미국 CIA 요원으로 발탁되어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이중 스파이로 활약하는데 그러다 보니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에 일조하게 된다. 90대가 되어 스웨덴 시골에서 고양이 한 마리와 조용히 살던 알란은 어느 날 산책하던 고양이가 여우에게 물려 죽은 것을 발견하고 폭탄을 설치해 여우를 죽인다.



동네 주민들은 알란을 요양원으로 보낸다. 알란은 100살 생일날 창문으로 빠져나와 무작정 버스를 탄다. 아무 생각 없이 조폭 청년의 트렁크를 가져온 그는 이웃 마을의 노인 율리우스와 어울리다 함께 조폭 청년을 죽여 시신을 기차에 유기한다. 트렁크 안에는 마피아의 불법 자금 60억 원이 들어 있었다.

갱단은 알란을 잡고 돈을 회수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데. 영화는 고양이를 잃게 되는 현시점부터 시작되어 100살 생일을 맞아 정처 없이 여행하는 알란의 여정이 그려지는 가운데 그가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정규 교육이라고는 초등학교 3년이 전부인 알란은 그러나 실력과 신념만큼은 최소한 박사급이다.

그는 전 생애 동안 양차 세계대전을 비롯해 스페인 내전, 한국 전쟁, 미국과 소련의 냉전 등 다양한 격동의 역사를 겪었지만 어떠한 정치적 편견도, 의도도 없이 그저 자신의 소신대로 행동해 왔다. 파시스트 대항 세력에 힘을 보태 주고자 스페인에 갔지만 정작 우연히 프랑코의 목숨을 구해 주는 ‘실수’를 하는 게 대표적이다.

또한 CIA와 KGB에 양다리를 걸치고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하지만 그 어느 쪽에도 크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저 양측이 원하는 수준에 근접하는 가벼운 정보를 흘릴 뿐이다. 게다가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스탈린에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자존감도 갖췄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작가의 상상력이다.

원작의 아이디어가 워낙 재기 발랄하기에 각색자는 그저 매끄럽게 줄이거나 살짝 바꿈으로써 원작만큼이나 훌륭한 시나리오를 완성할 수 있었다. 게다가 20대에서 100살까지 연기한 스웨덴의 ‘국민 배우’ 구스타프슨의 연기 솜씨도 매력 만점. 러닝 타임 내내 예측 불가능한 다음 시퀀스를 기대하게 만드는 흥미도 만점.



작품성과 완성도를 갖춘 재미 충만한 코미디로서 근래 보기 드문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재미와 흥밋거리 외에도 꽤 탄탄한 인생 교훈을 전달하기 때문. 그건 어머니가 알란에게 남긴 유언들에 담겨 있다. 먼저 운명론. ‘인터스텔라’에도 등장하는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았자 소용없다. 일어날 일은 어차피 일어난다.”라는 대사이다.

머피가 자신의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냐고 투정을 부리자 아버지 쿠퍼는 “그건 머피의 법칙이라는 뜻이 아니라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이 운명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어져 왔으며 약간씩 변형되거나 아류를 만들어 냈다. “우리 모두는 자라나고, 또 늙어가는 법이지.”는 운명론이자 인과론.

어떠한 일이나 현상에 대해서는 반드시 원인이 있기 마련이고, 그 일로 인한 또 다른 결과가 나오기 마련이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법, 그러니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 방법은 없다.”라는 대사이다. 종교인조차 ‘신은 왜 뱀을 만들었을까?’라는 의문을 갖는다. 물론 요즘에는 창조론보다 진화론으로 보기는 한다.

굳이 천지창조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파리, 모기조차 저마다의 존재의 이유는 있다. 최소한 잠자리나 제비의 먹이는 되니까. 그래서 “소중한 순간이 오면 따지지 말고 누릴 것, 우리에게 내일이 있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등의 대사는 매우 간단하지만 곱씹어 보면 의외로, 혹은 때로 꽤 유용한 삶의 지침서가 될 듯하다.

‘어차피 닥칠 일은 닥친다. 그러니 좋은 일이 오면 충분히 즐기자. 행여 나쁜 일이 올지라도 낙담하거나 괴로워하지 말자. 어차피 이 또한 지나가리니.’라는 솔로몬의 반지의 경구이다. 우리에게는 ‘일희일비하지 말라.’라는 잠언이 있다. 끝 무렵에는 어깨가 경직된 것을 느낄 만큼 많은 이야기가 버라이어티하게 펼쳐진다.

[유진모 칼럼 / 사진=영화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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