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층’, ‘매트릭스’에 묻힌 불운의 수작
- 입력 2022. 09.13. 10:25:02
- [유진모 칼럼] 영화 ‘13층’(조세프 루스낵 감독, 1999)은 1960년대에 출간된 대니얼 갤로이의 소설 ‘시뮬라크론 3’가 원작이다. ‘매트릭스’보다 6개월 정도 늦게 국내 개봉되어 별로 빛을 보지 못했지만 혹자는 ‘매트릭스’나 ‘인셉션’과 견주기도 한다. 배경은 1937년과 1999년의 LA인데 후자가 현실이고, 전자는 시뮬레이션 게임 속이다.
'13층'
퓰러는 첨단의 가상 현실 게임 회사를 운영하는 천재로서 친분 깊은 홀을 대표 이사로 앉혔다. 어느 날 밤 바에서 술을 마시고 나온 퓰러가 잔인하게 살해된다. 맥베인 형사는 퓰러가 죽으면 회사를 물려받을 홀을 강력한 용의자로 지목한다. 둘 사이에 퓰러의 딸이라는 제인이 나타난다. 홀은 퓰러에게 그녀 이야기를 들은 적 없다.
제인은 변호사와 함께 회사를 물려받을 절차를 진행한다. 궁지에 몰린 홀은 퓰러가 죽기 전 자신에게 메시지를 남겼다는 것을 알고, 회사 프로그래머 휘트니의 도움을 받아 게임 속 전자 인격체 퍼거슨에 접속한다. 퓰러의 메시지를 받은 바텐더 애쉬튼을 찾아가지만 그는 아무런 메시지도 전달 받지 못했다고 잡아뗀다.
퓰러가 죽던 날 들렀던 바 주인 톰이 홀을 찾아와 홀이 살인범이라며 눈감아 줄 터이니 큰돈을 달라고 협박한다. 홀은 그럴 리 없다며 톰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홀과 제인은 어느덧 연인 사이가 된다. 맥베인은 홀을 찾아와 톰이 살해되었다며 역시 그를 살인범으로 의심해 체포하지만 제인이 알리바이를 입증하자 풀어 준다.
그런데 갑자기 제인이 사라진다. 홀은 수소문 끝에 마트에서 나타샤라는 이름의 캐셔로 일하는 그녀를 찾아내는데. 영화는 대놓고 인트로에서 데카르트의 코기토 명제를 보여 준다. 즉 ‘생각하는 존재자’,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 그리고 ‘인셉션’의 꿈속의 꿈이라는 다중 세계 등을 혼합해 매우 철학적인 SF를 그린다.
원작이 있기는 하지만 독일 출신 루스낵은 매우 유려한 연출 솜씨를 뽐내며 재미와 완성도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다. 다만 워낙 액션의 신기원을 쓴 ‘매트릭스’의 화려한 명성에 가려 빛을 못 보았을 따름이다. 먼저 AI. ‘터미네이터’, ‘바이센테니얼 맨’, ‘A.I.’, ‘엑스 마키나’ 등이 보여 준 생각하는 기계에 대한 테제이다.
첨단 과학의 발달은 ‘과연 기계가 자아를 느끼고, 관념을 가지며, 의식으로 의지를 보인다면 기계일까, 생명체일까?’라는 도저한 질문을 도출해 내고 있다. 불교는 파리 목숨조차도 소중하다며 살생을 금하고 있다. 그런데 인공 지능이 고도로 발달해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이 생겨 자아를 깨닫는가 하면 인간을 돕거나 해친다면?
도울 경우에는 그 ‘생명’을 다른 동물, 더 나아가 인간과 동등하게 여길 것인가? 해칠 경우 마땅히 죽일(폐기할) 것인가? 만약 한 사람이 비무장으로 아프리카 벌판의 사자 무리에 들어간다면 사자는 필히 인간을 사냥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자를 멸종시켜야 한다는 논리는 절대 적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정반대이다.
기계가 생각할 줄 안다면 그런 논리를 반영할 것인가? 퓰러의 살인범이 누구인지 그 미스터리를 따라가다 보면 편지의 내용과 애쉬튼의 정체가 밝혀진다. 퓰러는 1999년의 그 세계 역시 가상 현실 게임이었던 것을 깨닫는다. 따라서 자신이 사용자에게 살해될 것을 알고, 유언을 바꾼 뒤 이 모든 사실을 홀에게 알리려 했던 것이다.
편지 속에는 그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애쉬튼이 읽고 충격과 분노 때문에 홀을 속인 것이었다. 대다수의 SF는 인공 지능이 인간과 동등한 지각을 갖춘다는 설정에서 흘러가지만 이 작품은 게임 속 캐릭터가 진짜 인간처럼 진화한다는 독특한 가상에서 펼쳐진다. 이는 시뮬라크르 이론과 ‘장자’의 호접몽론이 배경이다.
장자는 꿈속에서 호랑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다가 깨어 꿈속의 세상이 진짜인지, 지금 보는 이 세상이 진짜인지 헷갈렸다고 한다. ‘플라톤의 침대’도 그렇다. 플라톤은 침대와 동굴을 통해 현실과 사물이 복사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동굴 안에 갇혀 장작불에 의해 벽에 비친 그림자를 사실로 착각하고 사는 무지한 사람이라고.
‘터미네이터’에서 기계가 인간을 무참히 살육한다면 ‘매트릭스’는 기계가 인간을 자양분으로 삼는 최악의 디스토피아이다. 인공 지능은 인간을 사육하며 그들의 정신을 안락한 가상 현실 세계로 보냈다. 즉 AI는 현실과 가상 세계를 만들고 지배하는 신이다. 그런데 매트릭스의 요원, 즉 프로그램이 AI를 제치고 신이 되려 한다.
이 작품도 프로그램 속 캐릭터가 인간이, 신이 되려 한다. 휘트니는 궁금증을 못 참고 가상 세계에 접속해 애쉬튼에게 들어갔다가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애쉬튼이 1999년으로 온다. 애쉬튼은 홀에게 “왜 우리를 만들었냐?”라며 총을 들이댄다. 과연 제인은 누구이고, 나타샤는 또 어떤 인물일까? 퓰러의 살인범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제인이 홀을 찾아온다. 그녀는 데이비드라는 남자와 결혼한 유부녀인데 홀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맥베인 형사에게 전화를 건다. 제목은 퓰러가 사는 화려한 아파트의 13층을 뜻한다. 13은 서양에서는 불길한 숫자이다. 과연 이 세상은 창조된 것일까? 빅뱅 후의 진화에 의해 여기까지 온 것일까?
물론 종교에 부정적인 무신론자라면 당연히 다윈 쪽일 것이다. 심지어 종교인 중에 개종하는 이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만약 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개종하지 않았던들 기독교가 이토록 널리 퍼지고, 막강한 힘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런데 과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진짜인가? 우리가 생명체이기는 한 걸까?
우리는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 기독교가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영혼 불멸이 대표적.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고 했다. 우주가 끝없이 펼쳐지는 그 하늘 중 도대체 어디가 하늘나라일까? 무신론자는 죽으면 그걸로 그냥 끝이라고 한다. 화면이 내내 어둡고 비가 내리는 게 그런 뜻은 아닐까?
이 작품은 끝까지 실망시키지 않는다. 모든 사건들이 마무리될 즈음 시간은 점프해 2024년으로 간다. 그리고 테라스 밖으로 펼쳐지는 초현실적인 건물의 외양이 열린 결말 혹은 또 하나의 반전을 암시한다. 지적인 재미를 탐미하는 것을 즐기는 관객에게는 매우 훌륭한 SF 미스터리 영화이다.
[유진모 칼럼 / 사진=영화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