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아이', 아이는 천사, 육아는 지옥
입력 2022. 10.28. 14:31:52

'첫번째 아이'

[유진모 칼럼] ‘첫번째 아이’는 남자인 허정재 감독이 한 여성의 실존주의를 그린 영화로 연출과 편집 스타일이 다소 프랑스식이라 그런 형식을 좋아하는 관객과 페미니스트들에겐 박수를 받을 만하지만 설정에서 다소 억지스러움이 없지 않아 답답함을 느낄 관객도 있을 듯하다. 단 한 여성의 자아와 엄마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만큼은 장엄하다.

14개월 딸 서윤을 둔 정아(박하선)는 휴직 1년 만에 복직하며 보모를 구한다. 소개소와의 소통이 잘 안 돼 조선족 화자(오민애)가 온다. 정아는 미안하다며 돌려보내려는데 서윤이 그녀에게 덥석 안긴다. 회사는 1년 계약직으로 지현(공성하)을 고용해 일을 시키고 있는데 지현은 호시탐탐 정아의 자리를 넘보는 중이다.

정아는 어쩔 수 없이 화자를 고용한다. 어느 날 남편 우석(오동민)이 낮에 집에 들를 일이 있어 왔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놀란다. 화자는 휴대 전화를 안 받는다. 정아는 몸이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고 조퇴해 사방팔방 뛰어다녀 보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그런데 밤에 거짓말처럼 화자가 서윤을 안고 나타난다.

정아는 그녀를 해고한다. 서윤을 살피던 정아는 등에 멍이 들었음을 보고 분노한다. 결국 며칠 뒤 우석과 함께 주소를 들고 화자가 사는 곳을 찾아가는데.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지난해 기준 18살 미만 자녀를 둔 430만 가구 중 53%인 230만 가구가 맞벌이 부부인 것으로 나타났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는 한 평범한 부부라면 당연히 맞벌이를 해야 생계가 빠듯하지 않다. 일이란 돈벌이 수단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수단과 목적, 그리고 성취감과 매우 밀접하다. 부자라고 마냥 놀지만은 않는 이유이다. 오히려 돈이 많을수록 뭔가 해 보고 싶은 일이 더 많을 수도 있다.

가난하거나 최소한 평범한 사람에게 돈벌이를 위한 노동은 필수이다. 그런데 기혼자의 경우 부모의 압력에 의해, 혹은 스스로 원해서 2세를 갖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아이는 누가 키울까? 20세기만 하더라도 당연히 여자가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를 전담하면서 남자가 더욱 열심히 돈을 버는 것으로 여겼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심지어 남자가 휴직 혹은 퇴사를 하고 아이를 키우는 경우도 있다. 가장 바람직한 경우는 부부의 부모가 보아 주되 부부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아의 경우처럼 엄마가 병원에 입원 중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건강할지라도 육아에서 벗어나 노년을 즐기려는 이들도 꽤 있다.

정아가 보모 혹은 어린이집에 서윤을 돌보아 주는 비용을 지불하고 차비 등 사회생활에 필요한 돈을 쓰고 나면 사실 별로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우석이 그녀에게 그냥 집에서 서윤을 키울 것을 촉구하는 가장 앞선 논리이다. 하지만 과연 직장 생활이 돈이 전부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성인이라면 알고 있다.

아이도 갖고 싶고, 일도 계속하고 싶다. 그런데 어린이집 입원은 하늘의 별 따기이고, 믿을 만한 보모를 만나는 것 역시 바늘귀에 낙타 통과시키기이다. 이게 맞벌이 부부의 책임일까? 그중 여자의 책임일까? 절대 아니다. 나라의 책임이다. 언론은 세계 최저의 출산율이라고 떠들어 대는데 정부는 대책 마련 의지가 없어 보인다.

정아는 이 시대의 또 다른 ‘82년생 김지영’이다. 그 김지영만큼 성 차별과 무시를 당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사회적 편견과 선입견에 피해를 입고 있는 한편 화자의 입장에서는 가해자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현실적인 공포감을 조성하는 이유는 정아의 입장에서 가장 못된 가해자는 못된 직장 상사인 팀장이 아닌 우석이기 때문이다.

그는 악착같이 사회 커리어를 이어가려는 정아를 이해하지 못한다. 정아가 직장 생활과 절반의 육아를 동시에 하고자 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도울 생각이 없다. 오히려 정아에게 짜증을 내는가 하면 일이 잘못되면 그 책임을 정아에게 전가한다. 말로 표현만 안 할 뿐이지 ‘난 남자잖아.’라고 핑계 대는 것과 다름없다.

우석과 말다툼을 하던 정아는 “바람 좀 쐬고 올게.”라며 코트를 입고 밖으로 나오지만 우석은 “왜 그러느냐? 집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라고 졸졸 따라온다. 여자가 남자에게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은 해결해 달라는 게 아니라 그냥 들어 달라는 것인데 남자는 해결사 역할을 자처하고는 한다.

정아는 그냥 우석과 대화가 안 통해서 속이 답답해 그걸 풀고자 하는 것이지 대화를 풀어 볼 의지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부아를 식힘으로써 우석과의 충돌을 피하려는 것뿐이었다. 프레임 안에서 두 사람이 말없이 식사를 한다. 갑자기 우석이 오른쪽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이내 정아가 왼쪽으로 사라진다. 엔딩이다.

그건 남과 여, 남편과 아내는 영원한 동상이몽일 수밖에 없다는 메타포이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정아는 자신의 아파트 문 앞에서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인다. 그건 자식은 천사에 다름 아닌 보물 같은 선물이지만 대한민국의 육아 환경은 지옥이라는 의미이다. 들어가기 두려운 ‘홈 스위트 홈’이라니!

정아가 니체의 초인(위버멘시)이나 ‘권력에의 의지’ 같은 거창한 실존주의를 외친 것도 아니다. 그저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즉 절망만큼은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녀는 지성과 실력을 갖춘 커리어 우먼이다. 그런데 육아만 하게 된다면 서윤이 대학에 입학할 즈음에야 비로소 살림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그때면 50대. 나름대로 노년을 즐길 수도 있겠지만 젊었을 때 할 수 있었던 노동으로 인한 성취감만큼은 맛 볼 수 없다. 그 나이만의 보람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지나간 세월을 보상 받을 수는 없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은 죄이다.’라고 주장했다. 정아의 포기는 지상적인 것, 즉 현실 세계적인 것에 대한 절망에 이르는 길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결말은 매우 절망적이다. 93분. 12살 이상. 11월 10일 개봉.

[유진모 칼럼 / 사진=㈜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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