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샤프트', 코미디·스릴러 다 되는 사뮤엘 잭슨표 액션
- 입력 2023. 01.16. 14:11:37
- [유진모 칼럼] '샤프트'(존 싱글톤 감독, 2000년)는 스릴러에 코미디까지 적당히 갖춘, 썩 볼 만한 액션 영화이다. 부동산 재벌 아버지를 둔 인종차별주의자 월터(크리스천 베일)는 고급 바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백인 친구들과 함께 들어온 흑인 청년 트로이에게 시비를 건다. 트로이가 보기 좋게 망신을 주자 화가 잔뜩 오른 월터는 흉기로 그를 때려죽인다.
피플스는 함께 수감된 월터에게서 자신과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접근한다. 재판에서 월터 아버지에게 매수된 판사는 보석금 20만 달러에 월터를 풀어 주고, 그는 스위스로 잠적한다. 그러나 2년 후 샤프트는 그의 입국 정보를 알고, 공항에 매복해 있다가 검거한다. 그럼에도 판사는 보석금 100만 달러에 또 월터를 풀어 주고, 분노한 샤프트는 경찰을 때려치운다.
샤프트는 동료 카르멘(바네사 윌리엄스)의 도움을 받아 다이앤의 종적을 추적하고, 월터는 피플스를 찾아가 어머니의 보석을 내밀며 다이앤을 찾아 죽여 달라고 의뢰한다. 피플스는 '현금만 반는다.'라며 월터를 돌려보내고, 월터는 보석상에 가서 현금 4만 2000달러를 받아 나온다. 하지만 2인조 강도를 만나 돈을 담은 가방을 빼앗긴다. 강도는 샤프트와 친구.
피플스는 비리 경찰 로세티와 그로브스에게 다이앤의 행방을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샤프트가 월터에게 빼앗은 돈 가방을 로세티의 차 운전석 밑에 숨겨 놓고, 이를 피플스에게 알려 양측의 사이를 이간질한다. 우여곡절 끝에 다이앤을 찾아 낸 샤프트는 그녀에게 충격적인 말을 듣고, 카르멘은 로세티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데.
개봉된 지 23년 가까이 됐지만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다. 오히려 군더더기가 너무 없어 매우 스피디하게 즐길 만한 팝콘 무비이다. 총격전부터 카 체이싱까지 액션의 정석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마냥 가볍기만 한 것도 아니라 나름대로 자본주의의 메카인 미국의 문제점을 꼬집는 메시지도 담겨 있어 관람 후 남는 여운도 꽤 크다.
월터가 부동산 재벌 2세이면서 인종주의자라는 점은 자본 우선주의의 가장 큰 맹점을 드러내놓고 비판하는 것. 그의 조건은 전형적인 보수 우익의 기득권층이다. 그러니 흑인에게 배타적이고 자신이 우월하다고 우쭐댈 수밖에 없는 것.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중심적이므로,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 옳다는, 선입견과 편견이 강하기 마련이다. 법에는 둔감하고.
월터의 아버지는 사별한 전 부인의 보석을 젊은 연인에게 주고, 그걸 본 월터는 뒤돌아 가며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이 부자는 그야말로 돈의 가치에만 인식이 함몰된 미국인 다수의 물질만능주의의 부정적인 표상이다. 이 작품만 놓고 보면 미국인도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판사를 안 믿는 모양이다. 그만큼 공정한 판사가 없다는 증거이거나.
경찰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나마 경찰 중에는 정의를 구현하려는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도 있다고 설정한다. 샤프트는 판사의 두 번째 보석 판결에 통렬하게 경찰 배지를 판사에게 내던진 뒤 "때려치운다."라고 외친다. 그는 상사에게 "흑인이 경찰을 한다는 게 정말 어렵다. 권위와 절차를 바꿀 수 없기에."라고 사직 이유를 밝힌다.
그의 선배 경찰은 퇴직 후 고급 대저택을 구입한 배경에 대해 "잘만 하면 해먹을 데가 널렸다."라고 말한다. 그건 할리우드의 수많은 경찰 관련 영화에서 알 수 있다. 그게 자본주의의 아이러니이다. 돈 때문에 부자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 될수록 공무원의 비리의 영역은 확장된다는. 본래 '아메리칸드림'의 뜻은 계급 파괴로 골고루 잘 사는 나라였는데.
매스미디어의 폐해도 전한다. 피플스는 월터가 단지 상류층의 갑부라서 호기심을 가졌는데 TV 뉴스에서 그를 보더니 유명인이라며 갑자기 호감을 보이면서 적극적으로 그와의 거리를 좁히려 애쓴다. 화제가 되는 범죄를 저지른 범법자가 스타가 되는 것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인간의 음지에 숨어 있는 천박성과 미디어의 프로파간다 효과가 동침해 왜곡을 생산하는 것이다.
월터는 왜 다이앤의 신분증을 빼앗은 것일까? 사건 당일 다이앤은 귀가해 전화 한 통을 받는다. 10만 달러를 줄 테니 당분간 잠적해 달라는 것. 그 고백에 샤프트는 "지난 2년 동안 생지옥에서 살았겠군요."라고 위로한다. 만약 다이앤이 비양심적인 여자였다면 약속 받은 10만 달러 중 먼저 받은 5만 달러 외의 잔금 5만 달러를 빨리 달라고 월터를 압박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양심의 가책과 계속 거처를 바꾸며 숨어 산다는 불안감에 대해 괴로움을 느꼈다. 우리 속담에 '때린 놈은 다리를 못 뻗고 자도, 맞은 놈은 뻗고 잔다.'라는 게 있다. 만약 양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때려야 다리를 뻗고, 맞았다면 억울해서 못 뻗을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아직은 양심 없는 사람보다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왜 피플스의 하수인이 됐냐?"라는 샤프트의 질문에 로세티는 "사교육비 때문에."라고 답한다. 이 대화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로세티 입장에서는 사교육비 부담에 비해 터무니없는 경찰의 박봉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비리에 대해 나름의 당위성을 애써 부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비겁한 변명'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그 해명에 메아리가 붙는다.
그건 월터 부자와 변호사와의 대화에 등장하는 '주사위의 법칙'이다. 그것은 바로 표본 집단의 크기가 커지면 그 표본 평균이 모평균에 가까워진다.'라는 큰 수의 법칙이다. 취합하는 표본의 수가 많을수록 통계적 정확도는 올라간다는 것. 쉽게 이야기해서 카지노의 크기가 클수록 돈을 벌 확률과 액수가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자본주의이다.
인종 차별이 소재인데 유색 인종끼리 싸운다. 인종 문제가 미국에서는 여전히 숙제라는 자아비판이다. 적지 않은 백인이 인종을 차별하지만 흑인의 범죄 문제도 여전히 심각하다는 현실의 반영이다. 경찰서에서 인종 차별 발언을 한 동료 형사에게 샤프트가 야단을 치자 검거된 흑인 범죄자가 응원한다. 그러나 샤프트는 그마저도 억누른다. 주인공도 감독도 흑인.
결론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만한 내용에서 벗어나는 게 통렬하다. 샤프트가 법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월터를 잡기 위해 경찰을 그만둔 게 힌트.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함무라비 법전이 무조건 낡은 공식은 아닌 듯하다. 현행 법이 억울한 사람들을 통쾌하게 해 주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도 법 혹은 법조인에게 허점과 맹점이 많다는 증거가 아닐까?
[유진모 칼럼/사진=영화 포스터,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