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령’ 이하늬 “삶을 녹여내는 배우가 되고싶어요” [인터뷰]
- 입력 2023. 01.19. 07:00:00
- [셀럽미디어 전예슬 기자] “배우가 어떻게 보면 잔인한 직업이기도 하고, 나이가 들수록 풍성해지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30대 초반에는 ‘10년만 버티자’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죠. 그러면 어떤 이끼가 껴 있듯 껴 있을 거고, 그런 나를 바라보며 굴러보자, 배역의 크기를 상관하지 않고 계속 작품을 해보자 했어요. 저를 계속 구르게 하는 시간들이었죠. 거의 10년 정도 지나고 나니 ‘어느 정도 이끼가 꼈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유령' 이하늬 인터뷰
기자는 최근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영화 ‘유령’(감독 이해영)으로 돌아온 이하늬와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유령’은 1933년 경성, 조선총독부에 항일조직이 심어놓은 스파이 ‘유령’으로 의심받으며 외딴 호텔에 갇힌 용의자들이 의심을 뚫고 탈출하기 위해 벌이는 사투와 진짜 ‘유령’의 멈출 수 없는 작전을 그린 영화다. 이하늬는 극중 박차경으로 분해 열연을 펼쳤다.
“감독님이 책을 주셨어요. 차경 역할인데 한 번 읽어봐 달라고 하셨죠. ‘너를 염두에 두고 썼다’고 하시더라고요. 이건 배우로서 영광스러운 말이에요. 사실이든 아니든 너무 감사했죠. 황송하다는 생각으로 대본을 봤는데 너무 연기해보고 싶었어요. 배우가 작품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품이 운명적으로 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제가 액션을 소화할 수 있는 나이대의 시간이 겹쳐져 작품을 할 수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강렬하고 화려한 이미지에 가려진 절제하고, 누르는 연기가 보고 싶었던 이해영 감독은 깊은 슬픔에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차경 역에 이하늬를 떠올렸다고 한다. 이하늬는 차경 역을 통해 미세하게 드러나는 내면의 아픔, 안개처럼 짙은 의심을 뚫고 탈출하려는 과정에서의 액션, 나직한 저음으로 토로되는 감정과 결연한 행동까지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차경은 평면적으로 일차원적이지 않아서 좋았어요. 슬픔이나 화, 기쁨 등 감정들을 일차원적으로 쏟아내는 캐릭터가 아니라 아주 깊게 누르고, 눌러 표현하거든요. 표현적인 연기를 넘어 베어 나오는 연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레이어를 깊이 들어가는, 깊은 동굴에 있는 슬픔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가진 슬픔으로는 사실 잘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 제가 겪는 슬픔과 차원이 달라서 굉장히 많이 집중하려 했어요. 슬픔이 찰랑찰랑 채워져 있지만 절대 넘치지 않는, 그 포인트가 조금 고통스럽긴 했어요. 에너지를 쭉 유지하면서 봤어야 했기 때문이죠. 아주 복잡한 것들이 조금씩 드러나길 바랐어요. 연기하는 재미와 맛은 더 있었죠.”
극 초반, 난영 역의 이솜과 보여주는 케미가 돋보인다. 난영은 항일조직 흑색다의 단원으로서 활약하고 있는 또 다른 ‘유령’으로 총독부 내에 있는 항일조직 스파이 ‘유령’에게 정보를 전달받아 임무를 수행하는 행동 요원이다. 극 전반에 강렬한 인상을 주며 이하늬와 또 다른 앙상블을 보여준다.
“초반, 난영과 만나는 신은 감독님이 작정하고 아름답게 만들려고 디테일을 잡으신 것 같아요. 입술을 엄청 클로즈업하잖아요. 거기다 슬로우까지 걸었어요. 입술이 떨어졌을 땐 꽃이 피듯 확대되니까 입술이 아닌 느낌으로 되게 묘하더라고요. 큰 화면으로 보니까 ‘독특한 미장센은 이해영 감독님만이 가질 수 있는 거구나’를 느꼈어요. 또 우산에 떨어지는 빗물 한 방울의 디테일을 잡느라고 현장에서 고군분투했어요. 솜이는 얼굴이 많아요. 피지컬은 모델인데 스파이처럼 코트를 입었을 때 멋지더라고요. 캐릭터로서 멋지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되게 아름다운데 약간의 소년미도 있더라고요. 그 천진난만함 때문에 차경과 난영의 관계가 오히려 잘 보였던 것 같아요. 전사를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둘은 굉장히 어렸을 때부터 공유했을 수도 있겠다, 일반 사이는 아니겠구나’를 생각했어요. 아주 짧은 한 컷이지만 강렬했죠.”
차경은 조선 최고 재력가의 딸로 총독부 통신과 암호 전문 기록 담당으로 일하며 남다른 행로에 궁금증을 자아내는 캐릭터. 이하늬는 차경의 ‘전사(前史)’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차경의 지나치지 못한 마음 때문에 시작됐다고 생각해요. 재력가의 딸이었으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받고, 어쩌면 최고 엘리트로 자랐을 텐데 굳이 이런 삶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했죠.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내가 누리고 있지만 사회적인 책무감도 있었을 것 같아요. 시발점은 사랑하는 사람이었을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의 신념이 산산이 부셔지는 걸 바라보았을 거고요.”
유리코 역의 박소담과의 호흡 또한 영화의 관전 포인트다. 박소담은 극중 총독부 정무총감 직속 비서 유리코 역을 맡았다. 이하늬가 중심이 되는 여성들의 연대는 ‘유령’에서 주목할 만한 특별한 점이다.
“소담 배우는 한국 영화계의 보물 같은 존재에요. 부디 다치지 말고, 아프지 않았으면 해요. 박소담 배우의 개인 몫이 아닌, 특별관리 대상이라고 생각하죠. 하하. 그 나이대에 강단 있는 에너지로 연기하는 배우가 몇이나 될까 싶더라고요. 대체 불가능한 배우에요. 현장에서 볼 때도 진짜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그때가 소담 배우의 개인사로 힘들었을 때인데 이유를 모를 때 촬영했고, 아주 늦게 서야 그 이유 때문인 걸 알았어요. 개인적으로 힘들었음에도 흔들림이 없더라고요. 액션신도 보통의 배우에게서 볼 수 없었던 연기였어요. 하나하나가 다 감동이었죠. 나이가 어린 것 상관없이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해 결혼과 출산 등으로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이한 이하늬. 지난 6월 득녀한 그는 7개월 만에 빠르게 복귀해 많은 이들의 놀라움을 자아냈다. 출산 전후로 달라진 점이 있냐는 질문에 이하늬는 경이로운 소감을 전했다.
“출산을 겪으면서 정말 인간계와 신계가 동시에 있을 수 있구나를 생각했어요. 신의 영역, 창조의 영역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일이 몇이나 될까 느꼈죠. 심장이 두 개가 뛴다는 걸 느꼈어요. 배아로 시작해 태아로 만들어 인간이 된 거죠. 제가 37시간 동안 진통을 하고 아이를 낳았거든요. 사람이 너무 아프면 눈물이 그냥 나는구나를 깨달았어요. 되게 신세계였죠. 신의 영역에 잠깐 갔다 온 것 같아요. 이 땅의 엄마들은 모두가 한 일이구나를 느끼게 됐고요. 온몸으로 아이를 낳아보니 엄마들의 세상은 이런 거구나란 경외감이 들었어요. ‘똑바로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죠. 엄마를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배우를 바라보는 입장도 연기를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중요한 건 삶을 살아가고, 삶을 녹여내는 배우가 되고 싶어졌죠.”
[셀럽미디어 전예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CJ ENM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