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류 세계 드라마에 열광하는 대중의 이면 [셀럽이슈]
입력 2023. 06.20. 13:16:28

'상속자들'-'재벌집 막내아들'-'행복배틀'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한국의 안방 시청자들은 상류층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선호한다. 상류 계급이 등장하는 드라마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대중의 정서를 반영하며 여러 장르로 진화했는데 변하지 않는 하나의 원칙이 있다. 이들의 세계가 극과 극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가업의 창시자인 재벌1,2세는 관료주의적이며 무정한 아버지로 묘사되고, 남자주인공인 재벌3,4세는 낡은 것에 반기를 드는 인물로 표현되는 식이다.

이 극단성은 상류 계급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2세는 평범한 계층의 인물들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성역 안에만 머무는 절대 권력이자, 부패한 권력이다. 주 시청층인 평범한 서민들에게 그들은 부정적인 요소로 그려질 수밖에 없다.

반면 재벌 3,.4세를 묘사하는 방식은 완벽히 반대다. 당연한 전개다. 3,4세는 1,2세대와 달라야만 비밀스러운 성역 안에서 나와야만 서민을 대변하는 여주인공과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아버지로 대변되는 낡은 권력에 반기를 든 3,4세의 모습에 대중은 판타지를 충족한다.

상류층 남자가 가난하거나 평범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로맨틱 코미디는 세월을 거치며 변주됐다. 90년대 드라마에 상류층 남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건 장르가 로코이며 여주인공은 신데렐라임을 뜻한다. 당시 로코 드라마들은 이 포맷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00년대 초중반 여자주인공이 수동적인 캐릭터에서 자존심 강한 씩씩한 캔디로 변화한 것 말고는 로코 드라마 남녀 주인공은, 거의 모든 캐릭터가 비슷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리의 연인'의 한기주(박신양)과 그의 신데렐라 강태영(김정은)이 대표적이다. 한기주는 상류층 파티에서 주눅이 든 연인 강태영(김정은)을 향해 '왜 내 여자라고 말을 못해'라고 소리를 지른다. 이 장면과 대사가 수없이 패러디 된 이유는 상류층에 편입되고 싶어하는 대중의 판타지적 욕망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재벌 3세와 사랑에 빠진 우리의 신데렐라는 남자의 완벽한 수호가 지속돼야만 '성역' 안에 진입할 수 있고, 안전하게 머물 수 있다.

'꽃보다 남자'에서도 금잔디(구혜선)는 어떠한가. 부유층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에 전학을 온 평범한 여학생인 금잔디는 따돌림을 받고 밀가루 범벅이 되지만, 귀족들의 귀족 구준표(이민호)의 사랑 덕에 보호를 받고 신분이 상승된다.


신데렐라 스토리에 머물던 상류층 소재 드라마가 변주하기 시작한 건 2010년대 후반부터다. '품위있는 그녀'를 비롯해 '스카이 캐슬', '행복 배틀' 등 부유층이 등장하는 드라마들이 로맨스의 장벽을 넘고 풍부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2017년 방송된 '품위있는 그녀'는 재벌 3,4세 남성은 완벽하다는 공식을 깨기도 했다. 실제 재벌가에서 벌어진 에피소드를 넣은 것으로 유명한 이 드라마는 신데렐라인 여자주인공의 철저한 자기 반성으로 이어진다. 우아진(김희선)은 극 말미, 남편 안재석(정재석)과 이혼을 결심하며 진심으로 그를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가 탄 고급스런 외제차가 좋았다고 고백한다. 성역 안에 편입되고 싶었다는 신데렐라의 솔직한 고백이 의미심장하다.

금잔디와 우아진은 무엇이 다를까. 상류층을 바라보는 시청자의 이중적 관점이 각각의 캐릭터에 투영됐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크게 달라진다. 남자주인공의 사랑 덕에 상류 세계로 진입해 그 안에 완벽히 녹아들고 싶다는 욕망이 금잔디와 강태영을 대변한다면, 1세대든 4세대든 자본이라는 절대 권력은 도덕적일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한 자각은 우아진을 대변한다.


아이러니한 시청자의 두 관점이 정확히 충돌한 드라마가 있다. 바로 '재벌집 막내아들'의 결말을 둘러싼 시청자들의 반응이다.

지난해 미니시리즈 자체최고시청률을 기록했던 '재벌집 막내아들'은 재벌가의 경영 구조와 그 안에서의 권력 다툼을 풀어낸 드라마다.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 순양 그룹의 승계 싸움을 다룬 드라마는 재벌가 자제들이 무능력함을 꼬집으며 세습 경영을 비판했다.

순양그룹, 1세대 수장인 진양철(이성민)의 자리를 승계 받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자제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죄다 무능하다. 1세대가 이룬 성과를 승계할 자격이 없는, 그 힘을 담을 그릇도 못되는 어리석인 인물들로 묘사됐다. 이들은 순양그룹의 손자, 진도준(송중기)에 의해 민낯을 드러내고, 시청자들은 진도준의 복수에서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주목할 부분이 있다. 시청자가 호응한 이 쾌감 안에 아이러니가 발견된다는점이다. 진도준은 진양철의 손자로, 순양가의 순수 혈통이지만 사실 진도준의 진짜 정체는 윤현우다. 드라마 소재 특성상 '금수저' 진도준은 그저 '흙수저' 윤현우의 뜻대로 움직이는 아바타였을 뿐이다. 재벌 2세들의 실체를 까발린 자도, 장자 승계에 허점을 들춘 자도 윤현우였다.

그러나 시청자는 이 드라마가 진도준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윤현우가 전면에 등장해 순양의 부패를 청산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자 분노에 가까운 질타를 쏟아냈다. 혈통 위주의 승계를 보란 듯 비웃으며 진정한 능력을 드러낸 건 흙수저 혹은 서민인 윤현우였음에도, 정작 진짜 윤현우가 전면에 등장하자 용두사미 결말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는 상류 세계의 권력을 비판하면서도 선망의 대상으로 여기는 대중의 이중적 잣대에서 비롯된다. 윤현우가 진도준의 몸 안에 들어가 무능한 재벌2, 3세를 쥐락펴락하는 것을 보며 만족하던 시청자들은 윤현우가 자신의 정체를 오롯이 드러내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혀를 끌끌 차며 핏줄만 재벌인 무능력한 순양가 자제들을 비판하면서도, 그룹의 승계를 진도준이 잇길 바라는 시청자의 반응엔 이질감이 있다. 윤현우가 진도준에 완벽히 녹아들기 바란다는 점은 상류 세계에 온전히 녹아들고 싶다는 대중의 욕망을 말해준다.

상류 세계를 그리는 드라마의 소재는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권력과 자본의 세습을 비판하면서도 그들의 세계가 그 안에서 유지되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우리의 아이러니 덕에.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SBS, JTBC, ENA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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