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콘크리트 유토피아’ 이병헌, ‘아파트’ 노래신→영탁에 관한 모든 것 [인터뷰]
- 입력 2023. 08.17. 07:00:00
- [셀럽미디어 전예슬 기자] ※본 인터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이병헌 인터뷰
아직도 새로운 얼굴이 있다니. 매번 그의 연기를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온다. 캐릭터의 사연을 얼굴 표정만으로 다 소화해내 버리는, 배우 이병헌. 그가 또 다시 전에 없던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서울, 유일하게 남은 황궁 아파트로 생존자들이 모여들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김숭늉 작가의 ‘유쾌한 왕따’ 2부 ‘유쾌한 이웃’을 원작으로 각색됐다.
황궁 아파트 주민 대표 영탁으로 분한 이병헌은 아파트 안에서 점점 영향력을 넓혀가는 영탁의 변화를 디테일하고, 치밀한 감정선으로 표현해냈다. 친근한 이웃의 소탈한 웃음을 보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 폭발적인 카리스마를 발산하며 빈틈없는 연기로 관객을 압도하기도. 연기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매번 새로운 연기를 보여야한다는 부담감 또는 책임감은 없을까.
“이 질문을 15년 전에도 받았던 것 같아요. 문득 ‘계속 부담감을 가지고 있어야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죠. 그때는 막연하게 이 질문을 받으면 ‘언제쯤 그 부담감이 없어질까?’라고 생각했거든요. 막상 얘기를 들으니 똑같은 것 같아요. 그런 부담감, 떨림, 긴장감은 ‘제 감정이 관객들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어떡하지? 상식적이지 않으면 어떡하지?’에요. 그러면 사람들이 (극 속에서) 빠져나오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영화를 선보이기 전에는 항상 긴장해요.”
영탁은 아파트에 발생한 화재를 순식간에 해결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를 계기로 황궁 아파트의 주민 대표로 발탁되는 인물. 주민들의 안위를 위해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 추진력과 희생정신으로 모두의 신뢰를 얻게 된 그는 예측할 수 없는 위기 상황과 맞물려 긴장감을 일으킨다.
“영탁은 여기저기 당하고, 사기를 당해 분노도 있고, 우울감과 무기력함도 있는 인물이에요. 어깨에 많은 것을 짊어진 소시민 가장이죠. 영화가 시작될 때 영탁은 살인을 저지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았어요. 의도한 살인이 아닌, 감정과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우발적인 살인을 저질러 자기 가족들을 다 잃게 되죠. 이미 자기의 삶은 없어진 상황이에요. 그래서 초반에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하고, 어눌해 보이죠.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이유는 제정신의 상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추앙해주고, 대표로 선임해주는 자체도 ‘무슨 상황일까?’ 얼떨떨한 기분으로 영탁의 감정은 시작된다고 생각했죠. 금애(김선영)가 ‘세상은 리셋됐다, 살인범이나 목사나 다 같다’라고 하잖아요. 여기서 심경의 변화가 생기는 시작점이라 생각했어요.”
이병헌이 윤수일의 ‘아파트’를 부르는 신은 영화의 전반과 후반을 가르는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영탁의 숨겨진 사연들이 공개되는 해당 장면에서 이병헌은 연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콘티에는 마을 파티가 열리고, 술도 취해서 마지못해 떠밀려 노래를 부른다고 되어있어요. 이후 플래시백이 나오고, 끝나면서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빠지잖아요. 그 콘티를 보면서 감독님의 의도를 알고, 장면의 의도를 아니까 ‘굉장히 좋은 시퀀스가 되겠구나’ 상상하며 촬영했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좋은 시퀀스 중 하나에요. 무시무시한 음악이 흐르는데 노래를 부르는 입모양 장면은 상상도 못했죠. 그건 감독님의 후반작업이었어요. 그래서 되게 좋았죠. 현장에서는 가편집한 것만 보이고, 아무런 효과음과 음악이 안 들어갔거든요. 후반작업 후 만들어진 장면을 보면서 굉장히 임팩트 있는 시퀀스라 좋았어요.”
이병헌은 인간적인 동시에 카리스마와 날카로운 얼굴을 디테일하게 그려냈다. 영탁의 다변하는 감정선을 연결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터.
“모든 것을 다 잃고,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조차 못 느끼는 절망적인 우울한 상황 속 세상이 리셋되면서 뭔가를 깨닫고, 생각이 바뀌어요. 얼떨결에 주민 대표가 되고, 완장을 차게 되죠. 처음에 완장이라는 것도 못 느끼고 대표로서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을 위해 뭔가 한 번 해보자는 책임감을 느껴요. 모든 판단도 민주적으로 내려지면서 나름대로 맞다고 생각하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 권력의 맛을 느끼죠. 기형적인 형태로 커져 가는데 본인은 못 느끼는 부분이에요. 이곳의 생존자 또한 아픔이 있을 것인데 세상은 다시 시작되는 거죠. 그래서 여러 감정일 거라 생각했어요. 영탁이 오열을 하는데 진짜 생각했을 수도 있고, 관객들에게 정보로 보여주는 걸 수도 있어요. 영탁이 가진 심정은 여러 가지였을 거예요. 지워질 수 없는 아픔도 있지만 새롭게 시작된 두 번째 삶은 권력을 가진 리더로서의 삶이라 복합적일 것이라 생각했죠.”
영탁의 감정이 폭발하는 신은 혜원(박지후)을 절벽 아래로 던진 후 구역질을 하며 말하는 장면이다. 영탁의 감정 변화를 폭넓게 다뤘기에 이병헌은 해당 장면을 연기하기 전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 의외긴 했어요. 혜원을 진짜 던져버리기에. 꼭 해야 된다면 감정을 빌드업 시키자고 생각했어요. 빌드업 되는 상황이라 이해가 됐죠. 리더였던 나(영탁)를, 돈도 다 냈고, 내 집이나 마찬가지인데 나를 따르던 주민들이 나를 내몰려고 하는 상황이 되게 억울하겠다,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분노가 쌓였겠구나 생각이 들었죠. 그 상황에서는 물불 안 가리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 감정상태일 거라 생각하고 연기했어요. 이 상황에서 이성적이라면 도망갈 텐데 ‘혜원을 잡아 죽여야겠다, 너 때문에 다 잃게 생겼다’라는 생각을 했죠. 그래야 갈 수 있겠다 싶었어요.”
영탁의 첫 등장신도 강렬한 임팩트를 남긴다. 황궁 아파트에 불길이 번지자 의적처럼 등장, 몸을 던져 혼돈의 상황을 해결하기 때문.
“영탁은 사람을 죽인지 며칠 안 됐기에 자기 자신의 목숨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우울하고, 절망 한 가운데 빠진 무기력한 상황인데 다이내믹한 일이 벌어지고, 조건반사처럼 몸이 나간다고 생각했죠. 내 집인 아파트에 불이 난 상황을 보고 논리적으로 생각해 행동한 게 아닌, 무기력하고 우울했던 사람도 그걸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가서 얼떨결에 해버리는 것 같은 조건반사 행동이에요. 영탁에게 아파트는 내 집이기 때문이죠.”
극중 금애에게 뺨을 맞는 장면과 관련해 비화를 전하기도 했다.
“아침에 김선영 씨를 만나자마자 ‘선배님 어떡하죠? 때려야하는데’라고 하시더라고요. ‘연기이고, 한두 번 해보신 거 아니지 않냐’고 했죠. 그런데 조금 있다가 또 ‘어떡하냐’고 하길래 ‘마음껏 하시라’라고 했어요. 그런데 세상에서 맞은 것 중 제일 아픈 뺨이었어요. 잠깐이었지만 ‘여긴 어디지?’ 싶더라고요. 하하. 더 황당했던 건 감독님이 ‘이거 안 때려도 되는 신인데’라고 하셨어요. 카메라가 반대에 있어서 액션과 리액션만 해도 되는 신이었던 거죠. 저는 맞은 사람이지만 때린 사람은 통쾌함이 있겠다 싶었죠.”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잉투기’ ‘가려진 시간’을 연출한 엄태화 감독의 7년 만의 신작이다. 이병헌은 엄태화 감독과 2004년 박찬욱 감독이 공동연출을 맡았던 ‘쓰리, 몬스터’ 조연출 시절 처음 만난 뒤 20년이 지나 배우와 연출자로 재회했다.
“배우에게 디렉션을 많이 주는 감독님이 있고, 많이 주는 만큼 뭔가 부족해서 재테이크를 여러 번 가는 감독님도 있어요. 그런데 엄태화 감독님은 완전 반대 케이스더라고요. 엄 감독님은 디렉션을 거의 안 주셨어요. 신인배우나 처음 시작하는 배우들은 디렉션을 거의 안 주니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하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일부러 말을 많이 걸었죠. ‘이 신에 어떻게 생각하시냐, 뭘 실으시려 하는 거냐, 의도는 뭐냐’라고. 그러면 말씀을 안 하고 싶어도 하게 돼요. 그렇게 대화를 하다 보면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하고, 감독님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게 나오기도 하죠. 대화를 하면서 많이 고쳐간 부분들이 많은 영화에요. 예를 들면 이 캐릭터는 영탁이 아니고, 모세범이잖아요. 이름을 쓰는 장면에서 ‘ㅁ’ 먼저 쓴 거죠. 일부러 클로즈업을 한 장면이에요. 서로 이야기하면서 새롭게 아이디어를 낸 것들이 디테일하게 모인 거죠.”
영화는 황궁 아파트 주민들의 생존기를 스릴러이자 블랙 코미디로 풀어낸다. 생존이 걸린 극한의 상황 속 여러 인간 군상을 통해 현실적이고도 예리한 공감대를 선사한다. 이병헌 역시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대해 “이 영화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피식 웃게 되는 블랙 코미디도 있지만 웃으면서 긴장감이 커져요.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죠. 전체 정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이 영화가 재난 영화라 생각하지 않아요. 이 영화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죠.”
[셀럽미디어 전예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BH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