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 유재선 감독 “봉준호 키즈·리틀 봉, 기대에 부응하는 영화되길” [인터뷰]
- 입력 2023. 09.08. 14:03:39
- [셀럽미디어 전예슬 기자] 유재선 감독의 영화 입문기는 독특하다. 연세대 경제학 전공이었던 그는 문예 창작 강좌에서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것에 대한 매력을 발견한 후 대학 동아리를 통해 단편영화를 만들며 감독의 꿈을 키워갔다. 당시 만든 8편의 단편 영화 중 ‘영상편지’가 서울 독립영화제와 인디포럼 영화제의 경쟁부문에서 상영되고, ‘부탁’은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에서 판타스틱 단편 작품상을 수상했다.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옥자’의 연출부를 거쳐 ‘버닝’의 영문 자막 번역 등 다양한 곳에서 이력을 쌓은 그가 직접 각본을 쓰고, 만든 첫 장편영화가 바로 ‘잠’이다. “최근 10년간 본 영화 중 가장 유니크한 공포영화”라는 봉준호 감독의 극찬을 받을 만큼 ‘봉준호 키즈’ ‘리틀 봉’이라는 수식어를 입증한 유재선 감독. 그를 만나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잠' 유재선 감독
“차원이 다른 기분이었어요. 사실 영화 시나리오를 썼을 당시부터 촬영, 편집까지 저의 마음속에 둔 관객은 당연히 한국 관객이었거든요. 언론배급시사도 처음이라 떨렸어요. 기대치에 대한 부담도 있고,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런 것 같아요.”
‘잠’은 누구나 공감 가능한 일상적인 소재에서 나오는 미스터리한 이야기와 예측불가한 전개로 호평을 받고 있다. 유재선 감독은 ‘몽유병’ 또는 ‘수면 중 이상행동’ 환자들의 사례를 접한 후 ‘잠’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재밌는 장르를 가진 걸 써야겠다는 생각이 1순위였어요.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 현재 아내가 된 여자친구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죠. 무의식, 혹은 의식적으로 개인적인 삶과 화두들이 이야기에 많이 녹여졌어요. 주인공도 결혼한 부부이고, 두 부부의 결혼생활을 다루고 있죠. 보통 결혼 이야기를 다룬 것들은 주된 갈등이 있잖아요. 누군가가 실수를 해서 사랑이 식는다던지 등. 저는 아무래도 결혼을 앞둔 시점이라 낭만을 가지고 있었는지 정말 서로를 사랑하고, 응원하는 ‘베프’ 같은 부부를 설정했어요. 그리고 누구의 탓도 아닌, 외부의 장애물을 설정하게 됐죠.”
시나리오 단계부터 영화가 완성될 때까지 유재선 감독에게 많은 도움을 준 건 지금의 아내라고 한다.
“(아내가) 시나리오도 읽었고, 촬영 과정도 소상히 알고 있어요. 미완성본도 봤죠. 실제 완성된 건 칸에서 프리미어 상영으로 봤어요. 일단 ‘재밌게 봤어’라는 이야기를 해주더라고요. 예의상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요. 하하. 저와 함께 동행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객관적으로는 못보고, 많이 울컥했다고 했어요. 제가 고생했다는 걸 많이 느꼈다고 하더라고요.”
유재선 감독의 호기심을 자극한 건 몽유병 환자 당사자가 아닌,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하루였다. 도망갈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공포와 맞닥뜨린 사랑하는 두 사람이 부부로서 어떻게 맞서는지 ‘잠’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몽유병에 대한 피상적인 관심이 있었어요. 어렴풋이 호러의 주제가 된 것 같아요. 누구나 인터넷, 친구들에게 몽유병 환자에 관한 극단적인 괴담을 많이 들어왔잖아요. 잠결에 베란다에서 떨어져 내리거나, 수면 중에 차를 운전한다던지, 배우자를 해하려 하는 것 등. 그게 저의 일차적인 관심을 끌었죠. 시간이 지나면서 문득 ‘몽유병 환자들의 일상은 어떨까?’라는 궁금증이 생겼어요. 더 중요한 건 이 사람들의 곁을 지키는 배우자, 가족은 어떤 모습일까 싶어 소재로 정하게 됐죠. 또 한 번 돌이켜 보면 몽유병이라는 소재가 흥미로웠다 생각이 드는데 그 이유를 정리해보면 이런 장르 영화의 경우, 주인공이 공포의 대상, 혹은 위협의 대상으로부터 도망가거나 멀어지는데 저희는 그 대상이 사랑하거나, 지켜주고 싶은 대상이기에 도망가는 건 옵션이 아닌, 자의적으로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같이 돌파하는 게 흥미로웠죠.”
현실적인 공포로 압도적인 몰입을 선사하는 ‘잠’은 배우 정유미, 이선균의 신들린 열연도 빼놓을 수 없다. 두 사람은 각각 수진, 현수 그 자체로 분해 기존 작품에서 본 적 없는 새로운 얼굴을 선보인다.
“시나리오를 썼을 당시, 제작사 대표님께서 ‘네가 원하는 캐스팅이 누구냐. 실험 불가능하더라도 누굴 원하냐’고 해서 정유미, 이선균 배우를 언급했어요. 대표님께서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 않다. 좋은 배우는 흥미롭고, 좋은 시나리오에 반응한다’고 하셨죠. 시나리오를 드릴 찰나, 봉준호 감독님이 정유미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줬다는 소식을 접했어요. 제가 신인감독이라 힘을 싣고 싶으셨는지 낯 뜨거운 말씀도 해주셨죠. 시나리오를 정말 잘 썼다는 말과 함께요. (웃음) 두 배우의 연기력은 한국 사람이라면 좋아한다고 생각해요. 두 분의 필모를 보면 장르 영화를 굉장히 잘하시잖아요. 한편으로는 다큐멘터리 같은 현실 연기도 굉장히 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르 연기를 할 때도 굉장히 현실적인 연기 톤이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두 분이 하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신인감독이자 입봉작이기에 첫 촬영 전, 부담이 컸다는 유재선 감독. 배우들이 자신을 감독으로 대해줄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들었다고 하지만 그의 걱정과 우려는 기우였다. 촬영 첫날부터 이러한 생각들이 무색해질 정도로 배우들은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냈고, 스태프들도 성공적인 프로젝트를 위해 힘을 실어주었다고 한다.
“두 분은 아이디어가 넘쳐났어요. 연기, 대사 관련 아이디어가 많았고, 스태프들도 프로젝트를 어떻게 하면 더 좋게 만들까 고민했죠. 그래서 하루하루가 새로웠어요. 두 분의 연기 스타일은 극명히 다른데 오히려 재밌었어요. 예를 들면 이선균 배우는 열심히 공부해서 촬영장에 오는 스타일이에요. 매일 아침, 시나리오와 콘티에 적은 것에 대해 아이디어를 주셨죠. 촬영장에서는 배우가 현수를 알게 되는 상태까지 오기에 대부분의 아이디어가 잘 맞았어요. 촬영장에 올 때 이미 현수라는 캐릭터에 완벽히 빙의돼서 오셨죠. 정유미 배우는 캐릭터 연구를 굉장히 열심히 해서 본인이 구축한 캐릭터가 있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게 있으면 얘기해달라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생각하는 수진과 보인이 생각한 수진을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었죠.”
‘잠’은 호러 장르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복합적인 요소가 많은 영화다. 여러 장르가 군더더기 없이 흘러가는 게 ‘잠’의 큰 매력.
“재밌는 장르 영화를 만드는 게 1순위였어요. ‘잠’이 철저한 대중영화라 생각하기에 재밌는 장르 영화이길 바랐죠. 극장에 앉아있는 동안 1분1초가 재밌게 여겨졌으면 했어요. 영화를 보고 나서 정말 재밌는 영화를 봤다고만 느껴져도 굉장히 만족하죠. 시나리오를 썼을 당시, 코미디 요소를 중점적으로 염두하진 않았으나 각종 영화제, 한국에서의 반응도 감사하게 웃어주시더라고요. 큰 보너스인 것 같아요. 현실도 아무리 무서워도 가끔씩 웃길 때가 있는 것처럼요.”
유재선 감독은 ‘봉준호 키즈’ ‘리틀 봉’이라는 별명과 함께 전 세계 영화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들이 부담으로 다가오진 않을까.
“두 가지 부담이 있어요. 한 가지는 기대가 올라가니 기대에 부응하는 걸 제공해야하는 것.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좋은 자극이 됐죠. 혼을 갈아서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또 한편으로는 봉준호 감독님의 이름에 누가 될까 싶어요. ‘별 거 없네’라는 말이 나올까봐 걱정이죠. 그럼에도 개봉 전 많은 기대와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해요. 기대에 부응하는 영화가 되길 바라죠.”
[셀럽미디어 전예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