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의 나라’ 유재명이 표현한 전상두 “멈춰있는 스틸처럼” [인터뷰]
- 입력 2024. 08.16. 15:11:05
- [셀럽미디어 전예슬 기자] 영화 ‘소리도 없이’ ‘킹메이커’를 비롯해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비밀의 숲’ ‘이태원 클라쓰’에 이어 최근 공개된 ‘노 웨이 아웃: 더 룰렛’까지. 친근한 역할부터 치를 떨리게 하는 악역까지 매 작품 얼굴을 갈아 끼운 연기다. 이번에는 막강한 권력을 쥔 인물 전상두로 분해 내면의 분노를 이끌어낸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 유재명의 이야기다.
'행복의 나라' 유재명 인터뷰
“오랜만에 영화로 관객들을 만나 많이 설레고, 떨렸어요. 한참 전에 내부 시사로 완성이 덜 됐을 때 본 적 있거든요. 큰 스크린으로 보니 많은 생각이 왔다 갔다 했어요. 뜻 깊은 시간이었죠. 제가 나온 영화를 보는 게 쉬은 게 아닌데 영화를 보는 내내 ‘이렇게 만들어졌구나’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유재명은 극중 밀실에서 재판을 도청하며 결과를 좌지우지하는 합수단장 전상두로 분했다. 오로지 자신의 야욕을 위해 부정 재판을 주도하며 군부 집권을 이어가기 위해 군사반란을 일으키는 주동자로, 막강한 권력을 쥔 인물이다.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땐 정중하게 거절을 했어요. 왜냐면 전상두라는 인물이 안개 속에 있는 느낌이었거든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 인물의 이야기를 빌드업 시키거나, 표현하기에는 뭔가 조금 힘든 느낌이었어요. 다들 아시다시피 강력한 이미지의 캐릭터라 정중하게 거절했죠. 지난 시간 동안 설명할 수 없는데 그 인물이 계속 떠올랐어요. ‘이태원 클라쓰’와 비슷할 때였는데 잔상들이 떠올라 감독님에게 말씀드려 하게 됐죠. 지인에게 시나리오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하게 됐고요.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안개 속에 있는 인물이었어요. 전두환을 모티브한 인물이지만 설명할 수 없는 이미지 중에 가만히 앉아 무언가에 집중하는 모습, 눈빛이 있었어요. 직접적으로 떠오르지 않았는데 잔상에 남았죠.”
영화 ‘남산의 부장들’(감독 우민호)에서는 서현우가, ‘서울의 봄’(감독 김성수)에서는 황정민이 전두환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를 연기한 바. 그 밖에 다른 작품에서도 여러 배우들이 해당 캐릭터를 연기했기에 유재명은 ‘행복의 나라’ 속 전상두를 어떤 차별점을 두고 그려내려 했을까.
“자연스럽게 비교가 될 텐데 비교보다는 ‘남산의 부장들’ ‘서울의 봄’ ‘행복의 나라’를 통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연작으로 나와 고무적인 것 같아요. 그 시대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자유를 줬구나 싶었죠. 자연스럽게 비교될 텐데 비교 보다는 각각의 매력이 있구나, 그런 걸 생각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킹메이커’ 때도 제가 김영삼 인물을 연기했어요. 존경하는 경구 선배가 김대중을 연기했고요. 실존인물을 한다는 건 기본적인 한계가 있어요. 편견 보다는 선입견이 있죠. 그 인물의 말투 등 저 역시 그 인물을 맡으면서 실존했던 인물의 부담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에요. 말씀 드린 것처럼 저희 영화만의 맥락에서 전상두를 어떻게 연기 해야하나가 제일 중요했죠. ‘서울의 봄’에서 황정민이 연기한 뜨겁고, 열정적이고,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는 게 부각됐다면 ‘행복의 나라’에서는 밀실에서 술수, 편법, 상대를 가지고 노는 듯한 뉘앙스 등을 보여주려고 했어요. 작품을 찍을 땐 ‘서울의 봄’을 몰라서 집중해서 찍을 수 있었죠.”
유재명은 전상두를 표현하기 위해 머리를 짧게 깎았을 뿐만 아니라, 머리카락을 뽑는 등 노려을 기울였다. 전상두로 분해 현장에 나타났을 땐 같이 작품을 하는 스태프조차 알아보지 못했다고.
“분장팀, 감독님과 정리하면서 머리를 테스트 삼아 면도하고, 라인을 정리했어요. 제가 전두환과 닮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봤는데 너무 닮았다고 하니 놀랐죠. 실제로도 닮아 보이나요? 하하. 사건 브리핑을 하는 걸 내부 시사에서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내 얼굴에 그 사람이 있다고?’ 싶었죠. 기술을 가진 분들 덕에 잘 메이킹 된 것 같아요. 머리를 민 이유도 특별한 건 없고, 연극을 많이 하다 보니 그런 것에 대한 부담감이 없었어요. 자연스럽게 ‘테스트 삼아 해보시죠’ 했는데 몇 번에 걸쳐 잘 만들어진 것 같아요. 사실 머리를 밀면 모자를 쓰고 다니면 되니까 부담감이 없었죠. 생이빨을 뽑는 건 아니니까.(웃음)”
전두환을 모티브로 했지만 당시 권력의 실세라는 중심 요소를 두고 영화적으로 각색된 인물 전상두를 연기하는데 어려움도 컸을 터.
“촬영 3일 전쯤 전주로 내려가 감독님과 면담을 한 적 있어요. 배우들은 촬영 직전에 불안감에 시달리거든요. ‘준비한 것들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준비한 게 맞을까? 틀리면 어떡하지’란 생각이 기본적으로 따라와요. 어떤 건 만들어야 하는 것도 있고, 자연스럽게 포착되는 것도 있거든요. 그런 얘기를 하니 감독님도 놀라시더라고요. 자신에게 만들어 달라는 건 낯선 경험이라며 같이 만들자고 하셨어요. 촬영도 엄청 많은 버전으로 했어요. ‘오케이’가 났어도 ‘다르게 표현하고 싶냐’라고 물으시면 ‘이렇게 해보겠습니다’ 하면서 같이 만들었던 것 같아요. 어떤 신은 10개 정도 나온 것 같아요. 이 영화가 잘 되어서 디렉터스컷이 나온다면 새로운 전상두를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감독님은 집요하시고, 뚝심이 있으신 분이에요. 그런 걸 많이 열어주셔서 ‘행복의 나라’가 좋은 밸런스로 나온 게 아닌가 싶어요.”
유재명은 최근 공개된 ‘노 웨이 아웃: 더 룰렛’에서도 극악무도한 악역을 맡은 바. 살고자 하는 의지, 욕망을 불태우는 인간 김국호를 그려내며 시청자들의 치를 떨리게 만들고 있다. 김국호는 인간 본성의 악마성에 집중했다면 전상두는 개인이 아닌, 세력에 집중했다.
“전상두는 악마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노 웨이 아웃’은 분명한 죄를 지어 출소한 인물이죠. 인간 본성의 악마성이라면 전상두는 신군부라는 권력 안에 표현된 독재자 전 단계의 세력인 거예요. 키워드가 있다면 전상두 인물 보다는 그 세대인 거죠. 개인이 드러나기보다 세력이 표현됐으면 했어요. 저를 잡는 카메라 각도가 조금 달라요. 더 권력적으로 나오죠. 제가 크게 나오잖아요. 실제로 크기도 하지만, 하하. 빛과 어둠을 이용해 권력을 더 잘 잡아주신 것 같아요. 뉘앙스는 상대적으로 깔끔하게, 그러나 많지 않게. 눈빛, 고개, 각도 등 섬세함으로 승부를 봐야했죠. 실제 분량도 많지 않으니 그게 포인트였던 것 같아요. 이미지로 각인되어지는 세력, 뉘앙스로 느껴지는 세력. 국민을 개돼지로 취급하며 자신의 손아귀에서 주무를 수 있다는 오만함. 크게 소리치는 신도 없고, 우는 것도 없고, 멈춰있는 듯한 스틸이란 느낌이 들었어요.”
‘행복의 나라’는 10.26 대통령 암살 사건과 12.12 사태를 관통하는 ‘재판’을 주요 소재로 다루고 있다. 10.26 대통령 암살 사건에 대한 실제 공판이 진행되는 도중 여러 차례 법정에서 은밀히 쪽지가 전달돼 ‘쪽지 재판’ ‘졸속 재판’ 등으로 불린 역사적 사실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옮겨 담았다. 유재명은 제목이자 영화가 묻는 ‘행복의 나라’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행복이란 가치가 모든 개인에게 절대적인 가치인 건 당연해요. ‘행복의 나라, 행복한 나, 나의 나라는 무엇인가’ 복합적인 질문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 시대를 통과해서 2024년을 살고 있는데 태주 입으로 뱉어지는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아내가 밥을 짓고,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그때. 가장 원론적이고 근본이 소소한 행복이 먼 곳에 있는 건 아닌데 왜 우리나라는, 나의 조국은, 그런 것들을 무참히 짓밟히고, 해소되지 않은 것들을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직접적인 제목임과 동시에 함축적인 제목인 거죠.”
최근 한국 영화계에서는 근현대사를 다룬 시대극들이 꾸준히 흥행을 이어왔다. ‘택시운전사’를 비롯해 ‘1987’ ‘남산의 부장들’ 등 1970~80년대 격동의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들이 관객들의 선택을 받았고, 지난해에는 ‘서울의 봄’이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행복의 나라’ 또한 흥행 영광을 이어갈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된 상황.
“강줄기가 있다면 약간 ‘본류(本流)’ 같은 느낌이에요. 시대라는 사실에 기반을 둔 거죠. 한 개인의 삶과 죽음, 운명이라는 사건들, 그를 둘러싼 인물들이 얽히면서 재미와 감동을 주죠. 이게 영화적인 부분에서 본류적인 게 아닌가 싶어요. 실제와 허구 사이에 교차하며 관객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함께 주는, 그게 저희 영화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매력인 것 같아요.”
[셀럽미디어 전예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NEW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