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보이즈 인 더 밴드', 존중이 필요한 이들에게 [무대 SHOUT]
- 입력 2024. 11.26. 11:45:07
-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1968년 뉴욕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첫 막을 올렸던 '보이즈 인 더 밴드', 약 반백년이 지난 시점에 국내 연극으로 재탄생했다. 이 작품이 지금 올라와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좁은 무대를 가득 채우는 9명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이 이를 설명해준다.
'보이즈 인 더 밴드'
연극 '보이즈 인 더 밴드'는 뉴욕 고급 지역인 어퍼 이스트 사이드의 한 아파트에서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일곱 명의 게이 친구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극은 해롤드의 생일파티를 준비하는 마이클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주인공인 해롤드가 오기 전까지 도날드, 버나드, 에머리, 래리, 행크 등 게이 친구들이 모이고, 심지어 불청객 앨런과 해롤드의 선물로 지칭되는 카우보이까지 등장한다. "세상에 우연한 사고는 없다"는 도날드의 말처럼 한 자리에 모인 9명의 인물, 마이클이 제안한 전화 게임을 통해 이들은 어떤 현실을 마주하게 될까.
'보이즈 인 더 밴드'는 원작처럼 시점 변화 없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된다. 크게 각색하지 않아 영화 '보이즈 인 더 밴드'와 전개, 대사 등에 큰 차이가 없고, 인물들 간의 전사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는 특성 또한 그대로 살려냈다. 이에 쉴 새 없이 9명의 인물들이 주고 받는 대사 속 서브 텍스트를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한 9명의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각 인물의 개성이 강해 어렵지 않게 극을 따라갈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높은 톤의 목소리, 과한 제스처 등 흔히 동성애자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과 달리 이들은 다양한 형태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출연 배우 모두 원작 캐릭터를 열심히 연구해온 노력이 엿보여 동성애자를 희화화할 거라는 우려를 말끔히 지워낸다.
특히 오정택은 마이클을 통해 그간의 연기 내공을 제대로 보여준다. 자기 연민과 자기 혐오 사이에 놓인 마이클은 관객들이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캐릭터다. 극 초반에는 신사적이고 조심스럽지만, 술에 취한 뒤 친구들을 함부로 대하며 계속해서 선을 넘는 마이클의 모습들이 그려진다. 하지만 오정택은 자신만의 해석을 더해 충분히 관객들이 마이클이라는 인물의 감정을 따라갈 수 있게 만든다.
다른 배우들의 열연도 인상 깊다. 김바다는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섬세한 연기력으로 해롤드를 표현해 마이클과 아슬아슬한 신경전을 만들어낸다. 또한 김기택은 앞서 '히스토리 보이즈', '헤르츠클란', '알 앤 제이' 등 다양한 작품에서 오정택과 여러 차례 호흡을 맞춘 바, 이번 작품에서 마이클-도날드의 복잡 미묘한 관계를 잘 그려낸다.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낸 에머리 역의 홍준기도 강렬한 존재감을 보여준다. 가장 희화화되기 쉬운 캐릭터임에도 불구, 적절한 텐션으로 에머리만의 사랑스러움과 다정함을 잘 표현한다.
무엇보다 '보이즈 인 더 밴드'가 뜻 깊은 것은 영화·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이 주목 받는 시기에 개막했다는 점이다. '보이즈 인 더 밴드'는 1960년대 미국에서의, '대도시의 사랑법'은 2010년대 한국에서의 퀴어를 다루고 있다. 두 작품 사이에는 약 반백년이 흘렀지만,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이즈 인 더 밴드'가 왜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국내 무대에 오르게 됐는지, 왜 끝없이 목소리를 내야 하는지 알려주는 대목이다.
'보이즈 인 더 밴드' 속 캐릭터들은 마이클의 전화 게임을 통해 자신의 상처와 마주하게 된다. 또 배경음악 'Who I Am'처럼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지에 대해 계속 질문을 던진다. 누군가는 갈등을 해결하며 그 정답을 찾아가지만, 누군가는 무대를 떠나며 끝까지 현실을 외면하기도 한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래리의 대사에 나왔듯 "각자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다. 쉬운 듯 보여도 마이클이 자기 혐오를 덜어내지 못하는 건, 앨런이 끝까지 자신을 부정하는 건 결국 이에 대한 부재 때문이다. '보이즈 인 더 밴드'는 남을, 또 나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지에 대해서 계속 질문을 던진다.
'보이즈 인 더 밴드' 초연에는 오정택, 안재영, 박은석, 진태화, 김바다, 최정우, 정상윤, 이예준, 김준식, 김기택, 곽다인, 송상훈, 허영손, 강은빈, 김아론, 홍준기, 홍순기, 한민우, 박영빈, 김준호, 지병현, 김한빈, 박만준 등의 배우들이 캐스팅 됐다.
대학로에서 '믿고 보는 배우'로 자리 잡은 이들과 주목 받는 신예들이 힘을 합쳐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 특히 원작 자체에 드러나지 않는 내용이 많은 바, 각 배우들이 다르게 그려낸 캐릭터들을 보는 재미가 있다. 어떤 배우가 나오는지에 따라 극이 다르게 보이는 것도 '보이즈 인 더 밴드'만의 매력이다.
'보이즈 인 더 밴드'는 오는 12월 29일까지 링크아트센터드림 드림3관에서 공연된다.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더블케이엔터테인먼트 S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