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유정’ 박예영의 책임감 [인터뷰]
입력 2024. 11.27. 16:08:29

'언니 유정' 박예영 인터뷰

[셀럽미디어 전예슬 기자] “빠른 길을 선택하기보다 조금 느려도 건강한 선택을 해나가는 것들이 저에겐 체하지 않고 좋은 것 같아요. 욕심 부리지 않고, 나쁜 욕심만 있는 게 아니라, 착한 욕심도 부릴 줄 알지만 그걸 우선순위로 두지 않으려 하죠. 제일 먼저 기본적으로 인간으로서 해야 하는 선택을 두고, 그 다음 배우로서 하는 선택이 왔으면 해요.”

독립영화로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아 올린 배우 박예영.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안나’ ‘세작: 매혹된 자들’로 깊은 인상을 남긴 그가 이번에는 영화 ’언니 유정‘(감독 정해일)으로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자 한다.

‘언니 유정’은 예기치 못한 한 사건으로,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서로의 진심을 향해 나아가는 자매의 성찰과 화해 그리고 사랑에 대한 드라마를 그린 작품이다. 지난 5월 열린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CGV상을 수상하며 일찌감치 수작으로 손꼽혀온 이 영화는 오는 12월 4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극장에서 보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특히 ‘언니 유정’은 호흡, 순간, 선택, 눈빛 같은 게 잘 드러날 것 같거든요. 어떻게 얘기해야 진정성이 닿을까 고민돼요. 처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봤는데 촬영한 순간들이 생각나고, 잘 전달된 게 많은 것 같아 감사해요.”

박예영은 맡은 캐릭터에 대한 디테일한 분석은 물론, 정해일 감독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하며 윤색에까지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영화 속 주요 장면 중 하나의 내레이션 대본까지 직 작성하며 ‘언니 유정’을 향한 진심 어린 마음을 드러내기도.

“감독님이 하고싶어 하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섬세하게 들어가면서 저는 아이디어를 냈죠. 사건을 다루는 여자의 이야기를 잘 풀어내고 싶었어요. 시나리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아이디어 같은 게 반영됐고요. 감독님이 서프라이즈처럼 윤색에 이름을 올려주셨어요. 내레이션도 편집 단계에서 넣고 싶은데 어떤 방향이면 좋을까 얘기하다 기정이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하게 되면서 쓰게 됐죠.”



영화는 고등학교 내에서 벌어진 영아 유기 사건의 당사자임을 고백한 기정과 동생 기정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언니 유정이 겪게 되는 딜레마를 관찰한 작품이다. 다소 민감할 수 있는 ‘미성년자 영아 유기’란 소재를 다뤘기에 고민 또한 깊었을 터.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저도 편견일 수 있지만 잘 알지 못하는데 이런 소재를 다루는 건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하고 싶은 말씀과 누군가를 저격하는 내용이 아니라 이런 사건이 있고, 이걸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포커싱을 맞추려 했죠. 감독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돕고 싶다는 마음에 함께 하게 됐어요. 감독님은 남, 여 나뉠 것 없고, 여자를 더 잘 알아서가 아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집중하시는 편이거든요. 이번에 세 번째 작품인데 계산하기보다, ‘이런 사건을 하고 싶어, 여자를 잘 모르겠어, 도와줄 수 있니’라고 하시는 분이라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죠.”

정해일 감독은 ‘조카의 탄생’이 시나리오를 쓰게 된 계기가 됐다고 한다. 단순히 영아 유기의 당사자가 누구인지라는 질문에 갇히기보다, 해당 사건을 계기로 진정한 소통을 배워가는 자매의 모습을 중점적으로 담아내고자 노력했다.

“제가 제일 많이 참여한 건 대사에요. 같은 말을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르잖아요. 제가 이 작품을 하면서 특히 느낀 건 단어 선택이었죠. 같은 말을 해도 의미가 달라지는 것 같아요. 누군가를 저격하고 싶은 마음이 아무도 없으니까 흘러가는 대로 잘 받아들이게끔 선택해보자고 작업했죠. 이런 사건은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에요. ‘이걸 어떻게 바라봐야할까’ 계속 질문을 던졌어요. 저도 걱정을 한 건 누군가에게 영화를 소개할 때 ‘고등학생이 영아를 유기한 영화야’라고 소개되지 않았으면 했거든요. 영아 유기를 했는데 가까운 가족이 멀게 느껴졌고, 가족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에요. 소재가 자극적이긴 하지만 영하가 자극적이진 않아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을 겪고,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에 주된 목적을 가지고 있기에 신경을 많이 썼죠.”



박예영은 극중 동생 기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언니 유정 역을 맡았다. 유정은 엄마가 돌아가신 후 동생 기정을 돌보며 실질적 가장으로 살아온 인물이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대충 묶은 머리, 삶의 의욕을 잃은 공허한 눈빛, 영혼 없이 흘러가는 듯한 말투 등을 통해 캐릭터를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어머니에 대한 건 내레이션으로 나와요. 이 사건을 ‘어쩌다가? 누가?’에 초점을 두지 말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집중해보자 했죠. 희진이의 대사 중에서도 ‘누구랑 그랬는지가 중요해요?’가 있어요. 조금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사건을 겪은 여자들이 왜 혼자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다루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아빠 이야기가 있어도, 없어도 하는 이야기는 비슷했을 것 같죠. 엄마, 여자라서 나온 건 아니에요. 동생 기정을 낳다가 잃은 여자의 입장을 얘기한 거라 아빠를 일부러 배제시킨 건 아니죠. 그러다 보니 여성 중심으로 흘러간 거예요.”

2013년 영화 ‘월동준비’로 데뷔한 박예영은 다양한 독립영화에 출연하며 차근차근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쌓아갔다. 독립영화에서 얻는 에너지가 있지 않냐는 질문에 박예영은 “조금 더 야생적인, 날 것의 느낌들이 강하게 있다”라고 답하며 말문을 이어갔따.

“독립영화는 감독님, 배우들의 색깔이 확 묻어나는 작업 같아요. 상업영화에서 저는 ‘만들어진 울타리 안에서 신나게 놀아라’며 던져준다면 ‘어떻게 그 안에서 재밌게 놀까?’ 고민하죠. 반면 독립영화는 ‘울타리를 어떻게 만들래?’부터 시작하는 느낌이라 다른 것 같아요.”



‘언니 유정’은 어떤 울타리부터 세워갔을까.

“감독님이 원하는 울타리 모양, 색깔, 크기 같은 걸 알려고 했어요. ‘언니 유정’의 울타리 모양이 저에겐 조금 좁고, 긴 직선의 울타리라 생각했죠. 대사 하나도 예민하게 받아들여졌고요. 뉘앙스가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선을 넘은 것 같은 감정선이었거든요. 대사 선택, ‘아’ 다르고, ‘어’ 다른 뉘앙스를 훨씬 더 기민하게 다가가면서 울타리를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작업이었어요. 행여나 부러지거나, 선을 넘으면 누군가는 상처 받을 것 같은 이야기라.”

‘언니 유정’은 청소년 영아 유기에 대해 다루며 그 이면에 있는 것이 현실적인 문제만이 아닌, 관심의 부재를 지적한다. 매일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기에 당연히 잘 알고 있을 거라 짐작했지만 그렇지 못했던 자매가 조심스럽게 서로의 진심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쫓는다.

“이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도 고민이 된 건 사건에 대한 게 아닌, 사건을 겪는 가족에 중점을 두고 싶었어요. 그래서 감독님과 이야기를 많이 했죠. 중요하지 않은 것, 불필요한 것들은 많이 덜어냈어요. 가족에만 국한되지 않고, 가까이 있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모르는 게 많을 때도 있잖아요. 영화를 보고 난 뒤 가족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곱씹게 됐다는 후기가 들리면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사건을 겪었다, 사건을 겪은 기사를 보고 생각했다는 얘기보다 ‘이걸 보고 언니 생각이 많이 났다, 가족과 관계에 있어 질문을 던지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조금 안심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언니 유정’은 유정과 기정, 그리고 희진이 함께 마주 앉아 미역국을 먹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우리나라에서 출산한 산모는 미역국을 먹는다. 태어난 일을 축하하는 음식 또한 미역국이다. 그렇기에 엔딩에 등장하는 미역국 신은 남다른 의미를 가지는 장면이지 않을까.

“영화는 내내 기정의 아이인지, 희진이가 겪은 일인지 중요하지 않다고 끌고 가요. 그래서 유정이는 어디까지 아냐에 포인트를 주는 신이죠. 유정이가 알고 있지만, 수면 위로 꺼내고 싶지 않은 포인트인 것 같아요. 그건 판타지적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가족 일이면 수면 위로 꺼내서 명확하게 하고 싶을 수 있지만 유정이가 스스로 질문했을 때 ‘더 이상은 몰라도 될 것 같아, 우리는 모두가 미역국을 먹을 자격이 돼’라는 의미인 것 같아요.”

박예영은 어느덧 데뷔 11년차를 맞이했다. 특히 데뷔 그는 데뷔 10주년을 맞은 지난해 제21회 디렉터스컷 어워즈에서 ‘안나’를 통해 올해의 새로운 여자배우상을 수상하기도. 작품마다 각각의 인물에 맞춰 색다른 연기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낸 박예영은 앞으로도 새로운 얼굴과 디테일한 연기 변주로 대중들을 만날 예정이다.

“기본적인 걸 잃지 않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빠른 길을 선택하기보다 조금 느려도 건강한 선택을 해내가는 것들이 저에겐 체하지 않고 좋은 것 같아요. 욕심 부리지 않고, 나쁜 욕심만 있는 건 아니지만 착한 욕심도 부릴 줄 알지만 그걸 우선순위로 두지 않으려 하죠. 제일 먼저 기본적으로 인간으로서 해야 하는 선택을 두고, 그 다음 배우로서 하는 선택이 왔으면 해요. 성장한 지점은 아직 잘 모르겠어요. 하하. 작품에 도움 되는 연기를 계속 하고 있기를, 그 부분이 성장했길 바라는 마음정도인 것 같아요. 마음가짐은 오랜만에 단편영화를 찍어도 여기서 뭘 해야 하는지, 이 인물은 뭘 생각해야 하는지 똑같이 생각하고 있죠. 다만 감독님이 캐스팅할 때 인지도가 부족한 저를 누군가에게 설득해야하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저를 선택한 감독님들을 창피하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책임감이 달라진 것 같아요. 저라는 배우를 믿어준 감독님들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야지 생각이 들죠. 요즘 자주 하는 얘기인데 좋은 영화를 보면 하루가 빛나는 것처럼 그런 영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어요. ‘그런 영화에 참여했다니’ 생각이 드는 좋은, 빛나는 영화에 함께 하고 싶어요.”

[셀럽미디어 전예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씨제스 스튜디오, 스튜디오 하이파이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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