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경구가 만들어낸 설득력 '하이퍼나이프' [인터뷰]
- 입력 2025. 04.23. 16:00:00
-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데뷔 33년 차 배우 설경구가 '하이퍼나이프'를 통해 또 하나의 숙제를 완벽하게 마쳤다. 정상에서 벗어난 인물을 통해, 인물의 관계로 이끌어가는 작품을 통해 이번에는 변주의 재미를 찾아 나간 그다.
설경구
디즈니+ '하이퍼나이프'는 과거 촉망받는 천재 의사였던 '세옥(박은빈)'이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스승 '덕희'와 재회하며 펼치는 치열한 대립을 그린 메디컬 스릴러다.
그가 말했듯 '하이퍼나이프'는 장르물로, 우리가 평소에 쉽게 접할 수 있는 감정이나 캐릭터를 다루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경구가 이 작품에 끌렸던 이유는 무엇일까.
"작품 속 감정들이 묘했다. 지금까지 했던 감정이 아니었고, 우리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감정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대본이 박은빈 씨한테 갔다고 하니까 정말 의아하더라. 선한 역할만 했던 배우라서 생각할수록 이 사람이 하면 역으로 더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박은빈 씨 소속사인 나무엑터스 대표와도 마침 친구라서 통화해서 서로 얘기를 해봤고, 재미있겠다 싶어 출연을 결정하게 됐다. 낯선 느낌의 감정들이라서 사실 대본만 보고 선뜻 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다. 작가님도, 감독님도 기존에 친분이 있던 게 아니라서 선택의 폭이 확 좁아졌었다. 결국 배우끼리 서로 부딪혀야 되는데, 의외의 배우가 들어와서 정말 재미있었다. (박은빈 씨가) 날카롭게 생기기보다는 선한 느낌이라서 역으로 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극 중 설경구는 뛰어난 실력을 지닌 세계 최고의 신경외과 의사이자, 한때 가장 아끼던 제자를 잔인하게 내친 스승 최덕희 역을 맡았다. '하이퍼나이프'는 정통 메디컬 드라마와는 다른 결이었기에 설경구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인물에 천천히 접근했다.
"보편적인 감정으로 접근했다가는 전혀 말도 안 되는 캐릭터와 감정이었다. 그래서 비정상적으로 접근하는 게 맞았다. 그리고 세옥과 둘이 부딪히는 장면이 많다 보니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세희와 덕희는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했다. 일상에 없는 캐릭터지만 OTT나 영화 속의 인물이라고 생각하면 이런 캐릭터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걸 설득시켜야 하니까 배우로서의 숙제는 정말 많았다. 하지만 이해를 못 하거나 이 감정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서 못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둘다 비정상이라서 접점이 있었다.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다. 서로 물어뜯을듯하면서도 말도 안 되는 짓도 그냥 넘어간다. 그런 지점이 이해갔기 때문에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설경구가 연기한 덕희는 극 후반부 뇌종양으로 인해 죽음을 목전을 두게 된다. 이와 같은 캐릭터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10kg까지 체중 감량을 감행하기도 했다고.
"첫 시놉시스에 덕희가 점점 죽어가는 모습이 나와 있었다. 그걸 알고 있었기에 덕희가 점점 말라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감량을 하게 됐다. 사실은 영화를 생각해서 큰 묶음으로 나오는 스케줄을 생각했는데, 그게 안된다고 하더라. 이해가 되면서도 과거, 현재를 오가면서 한 날에 찍기도 하니까 미치겠더라. 과거와 현재를 왔다갔다 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화와는 달랐고, 현실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일단 살을 빼자고 생각하고 시작했다. 처음에는 답답해서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겠었는데, 어쨌든 마지막에는 빠진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하나였다. 그래서 3일 정도 단식을 했다. 원래는 단식을 쉬면서 해야 하는데, 촬영 중에 하니까 그건 조금 힘들더라. 하지만 건강한 모습으로 죽어가면 안 될 것 같았고, 저 자신이 부끄러울 것 같았다."
특히 '하이퍼나이프'에서는 덕희와 세옥의 복잡한 사제 관계가 가장 큰 관전 포인트였다. 일각에서는 이를 '피폐 멜로'로 정의하기도 했다.
"둘의 관계는 남녀 간의, 부녀 간의 사랑도 아니고, 일반적이지 않다. 은빈 씨가 문자로 '피폐 멜로'라는 표현을 보내줬었는데, 그 표현이 정말 재미있었다. 피폐한 사람들의 멜로, 선을 한참 넘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고, 아프면서부터 덕희는 세옥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던 것 같다. 뇌를 다치고 나서 세옥이 떠올랐고, 세옥한테 수술을 맡겨야 겠다는 결정을 했을 때부터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자신을 더 악화시키면서 뇌를 열게 만든다는 것도 일반적인 감정은 아니다. 그것도 비정상으로 생각해야 이해가 간다. 덕희는 어차피 살아도 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뇌를 건들면 그 이후의 후유증이 온다는 걸 이미 잘 안다. 그래서 이 아이를 나보다 한 계단 더 뛰어오르게 하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저는 멜로보다는 사랑이 맞다고 본다."
결국 시청자들에게 '하이퍼나이프'를 납득시키는 건 세옥과 덕희를 연기하는 박은빈과 설경구의 몫이었다. 설경구는 "초반에 세옥이 사람을 죽이는 게 불편하게 와닿을 수 있는데, 이 작품의 목표는 둘의 관계를 설득시켜 나가는 거였다. 그래서 살인 행위만이 남지 않게끔 만드는 게 숙제였던 것 같다. 살인만 남으면 문제가 있고, 둘의 감정이 남아야 했다"고 고민했던 부분을 털어놨다.
이와 같은 걱정과 고민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도 두 사람의 호흡 덕분이었다. 설경구는 박은빈에 대해 "후배보다는 동료로 봤다"라고 말하며 서로 믿고 촬영했기에 이와 같은 결과물을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저는 (은빈 씨를) 후배보다는 동료로 봤다. 서로 티키타카로 연기를 주고받고, 치고받는 게 재미있었다. 어떻게 하자는 약속도 없었고, 동선만 체크하고 촬영에 들어갔다. 저희도 부딪혔을 때 어떤 감정이 나올지 모르는 그 과정이 재미있었던 것 같다. 있는 그대로 촬영에 들어가면 그 반응들이 나왔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같이 촬영하는 배우 중에 이렇게 많이 대화한 배우도 처음이었다. 현장에서 사소한 일상 얘기도 하고, 작품 얘기도 주고받았다. 그렇다 보니 서로 편해진 부분이 있었다. 서로 잘 믿고 갔다. '계획을 짜놓고 꼭 이렇게 해야 된다', '성과를 내야 한다' 생각하기보다는 서로 믿고 했던 게 제일 좋았다."
쉽지 않은 숙제였지만 결국 '하이퍼나이프'에서도 설경구의 연기는 빛을 발했다. '하이퍼나이프'는 공개 직후 글로벌 OTT 플랫폼 시청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에서 대한민국 디즈니+ 콘텐츠 종합 순위 1위를 차지하고, 대만, 홍콩, 일본, 싱가포르, 터키 5개국 콘텐츠 종합 순위 톱5에도 이름을 올리는 등 글로벌 인기를 자랑했다.
설경구 역시도 이에 안도감을 드러내며 "제가 했던 작품 중에 이렇게 많이 분석해 주시는건 처음 본 것 같다. 저는 작품을 너무 분석하다 보면 그게 잡념이 될까 봐 상대방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렇게 시청자분들이 분석을 해주시니 그게 너무 고맙고 애정처럼 느껴져서 감사했다"고 말했다.
새로운 접근법이 많았던 만큼 배우 설경구에게 '하이퍼나이프'는 '변주의 재미'를 알게 해 준 작품이 됐다. 그는 "앞으로 작품에 따라서 다를 것 같다. 생각의 폭은 넓어졌는데 매번 변주하다가는 큰일 날 수도 있을 것 같다. 잘못하면 캐릭터가 망가질 수도 있으니 변주를 함부로 주지는 않고, 잘 살피고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