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라테르니테' 안재영이 바라본 '우리' [인터뷰]
- 입력 2025. 12.24. 15:05:45
-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같은 이야기를 다루어도 배우의 선택에 따라 극의 결은 달라진다. 안재영은 언제나 극을 조금 더 친절한 방향으로 이끄는 배우다. 그는 같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많은 해석과 표현으로 이야기를 또렷하게 만들고, 그 차이는 자연스럽게 관객을 이야기 안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된다. 뮤지컬 '프라테르니테'에서도 안재영은 '빅토르'를 연기하는 배우들 가운데 자신만의 친절한 해석으로 극의 방향을 정리하고 있다.
안재영
지난 10월 개막한 뮤지컬 '프라테르니테'는 18세기 말 프랑스, 한때 '형제'였지만 본격적인 혁명 이후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 두 남자가 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격변하는 프랑스 대혁명 시기를 빅토르와 제르베의 관계로 풀어내며, 자유와 평등, 연대라는 질문을 무대 위에 올린다.
벌써 공연의 절반 이상을 달려온 안재영은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다니 아쉽다"면서 "'프라테르니테'는 유독 더 아쉬운 생각이 드는 작품"이라고 돌아봤다.
이어 "프랑스 혁명 이야기지만 지금도 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 참여하게 됐다"며 "세상이 변했다고 하지만 지금도 어딘가에선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또한 작품에 나오는 것처럼 정말 '자유롭고 평등한가'에 대한 물음이 나오는 곳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해당 작품을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변호사 빅토르의 연설에 감명받은 굴뚝청소부 소년 제르베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를 무작정 찾아간다. 빅토르는 제르베가 선동에 소질이 있음을 깨닫고, 자신의 목표를 위해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다. 그 사실을 모르는 제르베는 친구들을 위해 선두에 서서 혁명을 이어나간다.
극 중 제르베는 무산 계급 노동자라는 출신부터 비교적 명확한 전사를 지닌 인물이다. 반면 빅토르는 이미 부르주아를 위한 움직임을 준비하는 모습으로 등장해 인물의 과거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안재영은 이 지점에 주목해 빅토르의 전사를 설명하기보다, 그가 작품 안에서 어떤 존재로 기능해야 하는지에 집중했다.
"빅토르는 나에게 이로운 '우리'를 생각했다가 점점 진정한 '우리'를 알아가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전사가 드러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창작진들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마지막에 제르베를 위해 희생하는 부분은 분명했으나, 초기 대본에선 빅토르가 그전까지 어떤 인물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래서 서사를 강조하기보다 이 인물이 '프라테르니테'라는 작품 안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래서 작품의 뜻과도 연결된 '우리'라는 단어에 조금 더 힘을 싣게 됐다."
빅토르는 제르베와 함께 하며 자신도 모르게 생각이 점점 변화하고, 부르주아 동료들과도 이념적인 충돌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빅토르의 말과 행동의 간극 역시 안재영에게는 중요한 고민 지점이었다. 그는 "인물을 표현해야 하는 정보량에 비해 관객분들을 만날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주어진 시간 안에서 인물의 설득력을 찾는 과정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겉으로는 냉정하고 고요하지만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빅토르의 감정선은 작업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도 했다. 그는 "빅토르의 변화가 잘 드러나지 않는 부분을 작업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빅토르는 제르베를 이용하다가 어느 순간 제르베를 통해 변화한다. 하지만 제르베를 위해 행동해야겠다고 결심하는 정확한 시점이 대본에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빅토르로서 아주 중요한 시점이기 때문에 이와 관련해 창작진과 회의를 많이 진행했다. 그래서 저는 자코뱅 클럽의 총을 쏘는 행동을 하나의 기준점으로 삼았고, 그 부분에 '저들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내가 원한 그림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라는 대사를 추가했다. 제르베와 자코뱅 클럽 사이에서 고민하고, 모든 것들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빅토르를 표현하고 싶었다. 다만 다른 빅토르 역의 배우분들과는 다를 수도 있고, 표현되는 방식 자체에도 열린 부분이 있는 만큼 관객분들이 보시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안재영의 친절한 연기는 '프라테르니테'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그는 "작품이 담고 있는 이야기의 서사가 방대하다 보니 이를 관객분들께 적절하게 전달하는 방법을 논의하는 과정이 어려웠다"고 말했듯, 실제 공연에서도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안재영이 추가한 디테일을 여럿 볼 수 있었다.
그가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점은 "모두가 행복해질 순 없지만, 모두에게 행복해질 자격은 있다"는 대사에 담겨 있다. 그는 빅토르의 대사를 통해 관객이 이 이상에서 현실로, 다시 연대로 향하는 과정을 따라올 수 있기를 바랐다.
"빅토르가 하는 '모두가 행복해질 순 없다'가 의미하는 바가 '모두가 행복할 순 없지만, 모두에게 행복해질 자격은 있다'라는 게 잘 보이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마지막 장면에서 '프라테르니테rep' 넘버 이후에 '모두에게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라는 대사가 저한테는 조금 친절하게 다가오지 않았던 것 같다. 처음에는 제르베를 이용하기 위해 썼던 말이, 마지막에는 제르베에게 중요한 의미로 전달됐으면 했다. 그래서 제르베가 다시 찾아와서 마음이 변한 척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엔 '모두가 행복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다소 현실적인 이야기를 더욱 강조한다. 처음의 '모두에게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라는 말은 그저 이상적이었다면, 마지막에는 '모두가 행복할 순 없지만, 그럼에도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자격은 있는 거다. 그러니 세상을 바꾸려는 마음을 절대 놓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라는 이야기를 제르베에게 남기고 싶었다."
이렇게 안재영이 쌓아 올린 디테일은 빅토르를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또한 이 변화는 제르베를 연기하는 배우들과의 호흡 속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안재영은 함께 무대에 오르는 세 배우에 대해 "(윤)재호는 자신만의 에너지가 있고, (김)기택이는 매번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예측 불가한 매력이 있다"며 "(이)세헌은 안정적으로 중심을 잡아주는 차분함이 돋보인다"고 전했다. 서로 다른 결의 제르베를 마주하며, 안재영이 그리는 빅토르 역시 조금씩 다른 온도로 변화하고 있다.
이처럼 작품에 대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지만, 안재영의 태도는 의외로 담백하다. '프라테르니테'를 통해 관객들이 무엇을 얻어갔으면 좋겠냐고 묻자 그는 "무언가를 꼭 얻지 않으셔도 된다"며 "그저 좋은 시간이 되셨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것 같다"고 답했다. 다만 안재영에게는 이 작품이 조금 다른 의미로 남았다. 그는 "제게는'연대'를 가장 깊게 체감하게 만들어준 작품"이라고 '프라테르니테'를 정의했다.
안재영은 올해만 해도 '랭보', '니진스키', '민들레 피리', '등등곡', '보이즈 인 더 밴드', '프라테르니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개막일 기준)까지 일곱 작품에 연이어 참여했다. 쉼 없이 이어진 행보의 원동력을 묻자 그는 "이렇게 저를 선택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 같다"며 그 공을 자신이 아닌 관객과 작품에 돌렸다. 그러면서 "거기에 힘입어 잘 달리려면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건강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쉴 때는 잘 쉬고, 잘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며 준비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좋은 작품에 참여하는 배우로서 현실적인 태도도 드러났다. 그는 "배우는 선택 받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먼저 한 약속을 우선적으로 지키는 편"이라고 말하면서도 "물론 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도전하기도 한다"고 열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안재영은 바삐 달려온 2025년을 "많은 사람들 덕분에 잘 달려온 한 해"라고 정리했다. 또한 앞으로의 바람을 묻자 그가 내놓은 답 역시 짧고 단정했다. "좋은 배우가 되고 싶고,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나아지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말처럼, 그의 시선은 늘 다음 결과가 아닌 다음 하루를 향해 있다.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엠비제트컴퍼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