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안성기를 추모하며] 기자들이 되짚은 국민배우 안성기의 대표작 다섯 편
입력 2026. 01.06. 09:00:00

故 안성기

[셀럽미디어 취재팀] 한국 영화의 굴곡진 시간을 가장 묵묵하게 통과해온 얼굴이 있다. 소년 배우로 스크린에 등장한 이후 69년을 넘게 주연과 조연, 상업과 예술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한국 영화사의 중심을 지켜온 고(故) 배우 안성기다.

그는 언제나 이야기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앞세우지 않았고, 영화가 필요로 하는 자리에서 조용히 한 시대의 감정을 대신 살아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국민 배우’라는 수식어를 넘어, 그는 한국 영화 그 자체였다.

셀럽미디어는 안성기의 연기 인생을 다시 읽기 위해 다섯 명의 기자가 각자의 시선으로 그의 대표작 한 편씩을 선정했다. 한국 영화가 걸어온 길과 함께 호흡해온 배우 안성기를 기억하며, 지금 다시 꺼내 보아야 할 작품 다섯 편을 통해 그의 이름이 남긴 의미를 되짚는다.

미술관 옆 동물원



◆ 안성기의 인간적인 얼굴 '미술관 옆 동물원'(신아람 기자)

미술관 옆 동물원
개봉: 1998.12.19
장르: 멜로/로맨스

한국 멜로 영화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미술관 옆 동물원'은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나 한 집에서 기묘한 동거를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시나리오 작업을 함께하면서 일상을 공유하던 두 사람은 한정된 공간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스며들면서 사랑에 빠지게 되죠. 작품은 극적인 사건보다는 인물들 사이에서 서서히 쌓이는 섬세한 감정 변화와 관계의 결을 섬세하게 그려낸 한국 로맨스 드라마에요. 극 중 안성기는 국회의원 보좌관 서인공 역을 맡아 90년대 특유의 아날로그 감성 연기를 보여줘요.

"사랑이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줄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 버리는 것인 줄은 몰랐어"

이 영화에서 안성기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묵직하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보다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로맨스 연기를 보여줘요. 과장하지도,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인물의 내면 변화를 특유의 일상연기로 자연스럽게 보여주죠. 자극적인 콘텐츠에 익숙해진 요즘 우리가 잊고 지냈던 풋풋하고 잔잔한 감성을 느낄 수 있어요. 안성기를 비롯해 심은하, 이성재까지 9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들의 현실 공감 연기도 보는 재미를 더하죠. 꾸밈없는 풋풋한 멜로가 그립다면,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

실미도



◆ 시대를 살아낸 한 어른의 얼굴 ‘실미도’(전예슬 기자)

실미도
개봉:2003.12.24.
장르:전쟁, 스릴러, 드라마, 액션

‘실미도’는 백동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강우석 감독이 제작해 2003년 12월 24일 개봉한 영화입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이며 역사에서 지워지고 숨겨진 684부대와 실미도 사건을 재구성해 주목 받았죠. 안성기는 극중 684부대의 지휘관 최재헌 역을 맡아 열연했었요. 유명한 명대사는 “날 쏘고 가라. 아니면 내기 널 죽일 수밖에 없다”이죠.

안성기 출연작 가운데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작품은 ‘실미도’에요. 국가와 이념 앞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소모되어 가는지를 말보다 표정과 호흡으로 보여주는 연기가 깊이 남더라구요. 감정을 과시하지 않는데도 장면마다 묵직한 울림이 있어요. 영웅이나 비극의 상징이 아니라 시대를 살아낸 한 어른의 얼굴을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시간이 지나 다시 떠올릴수록 이 작품이 안성기라는 배우의 무게와 품격을 가장 대중적으로 전해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라디오 스타



◆ 안성기·박중훈의 찐우정, '라디오 스타'(임예빈 기자)

라디오 스타
개봉:2006.09.28
장르: 코미디, 드라마

영화 '라디오 스타'는 세월이 지나 몰락한 '가수왕' 최곤(박중훈)이 지방 라디오 DJ로 발탁되면서 시작됩니다. 최곤은 우연히 시골 다방 아가씨 김양을 라디오에 출연시키면서 큰 인기를 얻게 되고, 재기의 발판을 얻게 됩니다. 안성기는 주인공 최곤의 20년지기 매니저 박민수 역을 맡아, 진정한 우정을 보여주며 감동을 선사합니다.

안성기와 박중훈은 '칠수와 만수' '투캅스' 등에 함께 출연하며 영화계에서 가장 유명한 콤비로 꼽혔습니다. 그중 우정을 그린 '라디오 스타'에서는 두 사람의 우정이 여실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는 작품입니다.

현실에서도 '영화계 명콤비'로 꼽힐만큼 서로를 아끼고 깊은 우정을 나눴던 박중훈과 안성기의 연기 호흡이 가장 큰 추천 포인트 아닐까요? 특히 마지막에 박민수가 최곤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장면은 안성기가 즉석으로 제안한 장면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 영화의 주제곡이라 할 수 있는 '비와 당신'과 어울어져 잔잔하지만 오랜 여운을 남깁니다. 라디오라는 매체가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도 많았지만, 라디오는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좁아질지언정 사라지지는 않았죠. 그 모습이 안성기가 한국 영화계에 보여준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화려한 휴가



◆ 잊어선 안될 역사를 돌아본 '화려한 휴가'(정원희 기자)

화려한휴가
개봉:2007.07.25
장르:드라마

1980년에 일어났던 5.18 민주화운동을 모티브로 제작한 영화입니다. '화려한 휴가'는 당시 진압에 참여했던 육군특수전사령부 대원의 수기에서 따온 제목이에요. 평범한 일상을 살던 이들에게 총, 칼로 무장한 시위대 진압군들이 나타나고, 무고한 시민들이 폭행, 그리고 심지어 죽임까지 당하게 돼요. 그리고 퇴역 장교 출신인 흥수를 중심으로 시민군이 결성되고, 그 이후로 벌어진 열흘 간의 사투를 담은 영화입니다.

안성기는 '화려한 휴가'에서 퇴역 장교 출신인 흥수 역을 맡았습니다. 그는 시민군을 조직하고 지휘하는 역할을 하죠. 특히 안성기가 실제 ROTC 장교 출신이라 군사용어와 무기 운용을 척척 소화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화려한 휴가'는 영화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역사적으로 꼭 짚고 가야 할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배우 안성기의 필모그래피를 쭉 살펴보면, 더욱 의미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성기는 '아들의 이름으로'(2021)을 통해 또 한 번 이 사건을 다뤘거든요. 5.18을 영화로 표현하는 일도 쉽지 않은데, 무려 두 편의 영화로 이를 알렸다는 거죠. 심지어 '화려한 휴가' 개봉 당시 제작진과 배우들은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헌화·분향했다고 해요. 괜히 그가 '국민 배우'로 불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카시오페아



◆ 따뜻한 아버지의 얼굴 '카시오페아'(박수정 기자)

카시오페아
개봉: 2022.06.01.
장르:드라마

‘카시오페아’는 변호사, 엄마, 딸로 완벽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했던 수진(서현진)이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며 아빠 인우(안성기)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특별한 동행을 담은 작품입니다. 극 중 안성기는 인우 역을 맡아 서현진과 부녀 호흡을 맞추며 지금껏 본 적 없는 부성애 열연을 펼쳤죠.

이 작품은 안성기 배우의 유작 중 하나가 됐어요. 유작은 '카시오페아'를 포함해 ‘한산: 용의 출현’ ‘탄생’ ‘노량: 죽음의 바다’(특별출연) 4편이에요. 모두 암투병 중 촬영해, 2022~2023년 개봉했었죠. 당시 안성기 배우는 그간 투병 사실을 알리지 않았던 이유는 주위에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전했었습니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안성기가 단 한 번도 영화 촬영에 허투루 임한 적이 없다며 그의 연기 열정을 높이 샀기도 했었죠.

오랫동안 기억될 '국민 배우' 안성기의 얼굴이 '카시오페아'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어요. 따듯한 눈빛과 포근한 목소리가 그리울 때마다 꺼내보고 싶은 작품으로 남을 듯 싶습니다.

[셀럽미디어 취재팀 news@fashionmk.co.kr / 사진=CINE2000, 시네마서비스, CJ엔터테인먼트, ㈜트리플픽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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