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수빈이 완성한 '말리', 타인의 기대 속에서 잃어버린 목소리[리뷰]
- 입력 2026. 01.12. 14:35:29
-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우리는 언제부터 스스로의 선택보다 주어진 길에 익숙해졌을까. 그렇게 흘러온 시간 끝에서 과연 자신의 목소리는 얼마나 되찾았을까. 뮤지컬 '말리'는 잃어버린 기억 너머의 '나'를 조심스럽게 꺼내 보인다.
'말리'
'말리'는 화려한 아역 스타였던 과거를 가졌지만, 현재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18세 '말리'가 과거로 돌아가 인형 '레비'의 몸으로 11세의 자신을 만나는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이다.
이 작품은 지난 2022년 '말리의 어제보다 특별한 오늘'이라는 제목으로 트라이아웃 시즌을 첫 선을 보인 후, 제15회 DIMF(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창작 뮤지컬상을 수상했다. 또한 높은 완성도를 인정받아 영미권 개발 프로그램에 선정돼 2023년 뉴욕 소재의 Playwrights Horizons와 Open Jar에서 2차례 낭독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바 있다. 이후 2년 간 한국과 뉴욕 창작진의 워크숍을 거치며 꾸준히 업그레이드돼 왔다.
영국에 살고 있는 18살 엘리는 원래 한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모으던 아역 스타였다. 하지만 엘리는 자신이 스타였다는 사실만을 기억하고, 대부분의 기억을 잃어 왜 이름을 말리에서 엘리로 바꾸었는지, 자신이 지금 왜 해외에서 살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러던 중 엘리는 다락에서 자신이 애정하던 토끼인형 레비를 발견하고, 레비는 엘리에게 말을 건다. 레비의 몸으로 들어간 엘리는 11살의 '말리'를 마주하게 된다. 과연 잃어버린 기억 속 말리에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었을까.
'말리'가 가장 좋았던 부분은 단연 메시지에 있다. 말리가 어린 시절 힘들어했던 이유는 단순히 혹독한 환경 때문이 아니라, 어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버텨야 했던 시간에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말할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아역 배우 말리의 모습은 현실의 여러 얼굴들과 자연스레 겹쳐졌다. 실제로도 많은 아역 배우들이 또래와의 일상적인 시간을 누리지 못한 데서 오는 고충을 뒤늦게 고백해온 만큼, 이 서사는 결코 과장된 설정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말리'는 단순 가족 뮤지컬로 한정하기 어렵다. 어린 말리의 삶을 따라가지만, 이는 곧 지금을 살아가는 어른들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말리는 어른들의 사정, 사회의 구조 등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을 외면하며 살아간다. 이는 지금의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반복해온 삶의 궤적과도 닮아 있다.
이 작품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공감을 얻는 이유는, 결국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분명하게 건네기 때문이다. "타인의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고 내 안의 답을 믿고서 나아가야 한다는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는 김주영 작가의 말처럼 '말리'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되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관객 각자의 삶을 조용히 되돌아보게 만든다.
메시지의 설득력을 높이는 데에는 아역 배우들의 역할도 크다. 18세 말리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작품이지만, 어린 말리들의 감정선이 충분히 납득되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납득되기 어렵다. 하지만 무대 위의 아역 배우들은 성인 배우들과의 호흡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몫을 해냈고, 어린 말리가 느꼈을 혼란과 외로움을 자연스럽게 쌓아 올리며 서사의 기반을 탄탄하게 다졌다.
말리 역을 맡은 박수빈의 연기 역시 인상적이었다. 말리는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거의 퇴장하지 않는 인물로, 현재의 자신을 연기하는 동시에 인형 레비의 몸을 빌려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는 복합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시공간을 오가며 복잡한 내면을 표현해야 하는 캐릭터지만, 박수빈의 말리는 인물의 변화를 끝까지 따라가게 만든다. 아이돌 활동을 시작으로 뮤지컬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져온 그는, 말리가 겪어온 시간의 결을 자신의 이력에 자연스럽게 투영해 무대를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어린 말리가 끝내 마주한 선택의 순간은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이미 지나왔거나 여전히 지나고 있는 시간과 닮아 있다. 이처럼 '말리'는 각자의 삶을 조용히 돌아보게 만들면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을 묻는다.
'말리'는 오는 2월 15일까지 서울 백암아트홀에서 공연된다.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주)주다컬쳐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