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 입은 남자'·'판', 과거를 빌려 현재를 말하다 [공연 VS.]
입력 2026. 01.20. 15:39:22

'한복 입은 남자'-'판'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과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반드시 과거의 이야기만을 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를 경유하면서 지금 이 시대를 가장 선명하게 비추기도 한다.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와 '판'은 모두 조선시대를 무대로 삼고 있지만, 무대 위에서 느껴지는 온도는 낯설지 않다. 한 작품은 장영실의 행적을 바탕으로 조선과 이탈리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고, 다른 한 작품은 19세기 조선 후기의 전기수 이야기에 정치 풍자와 밈을 과감하게 담아냈다.

이 작품들이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역사를 조명하는 데에 있지 않다. 오히려 과거는 대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장치가 되거나,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한 질문을 가장 트렌디한 언어로 던지는 도구로 기능한다.



◆ '한복 입은 남자', 사라진 기록을 다시 꺼내는 방식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는 조선 역사상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은 장영실의 마지막 행적을 소재로, 조선과 이탈리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방대한 서사를 입체적으로 풀어낸다. 히스토리와 상상력이 결합된 작품으로, 1막은 조선, 2막은 유럽을 무대로 삼는다.

방송국 PD인 진석은 이탈리아 유학생 엘레나로부터 비망록을 받게 된다. 진석은 이를 고서 연구가 강배에게 번역 의뢰를 맡기고, 비망록의 주인이 장영실임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루벤스의 그림 '한복 입은 남자', 그리고 장영실의 비차와 다빈치의 비행기 설계도 사이의 연결점을 추적한다.

조선의 '천재 과학자'로 불렸던 장영실의 기록은 1442년 그가 만든 안여가 부서지는 사건을 끝으로 사라졌다. 이후 그에게 곤장 80대와 관직 회수라는 중형이 내려졌고, 그가 곤장을 맞고 죽었는지, 유배를 떠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작품은 사라진 장영실의 기록에서 시작된다. 장영실이 대신들의 모함을 피해 이탈리아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승이 됐다는 상상력이 담겨 있다.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지점은 배우들의 1인 2역 설정이다. 현대의 인물과 과거의 인물을 동시에 연기하는 구조는 단순한 멀티 플레이가 아니라,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의 방향을 드러내는 방식으로도 느껴진다. 극 중 장영실의 이야기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를 사는 인물들의 시선과 겹쳐지며 반복된다. 같은 배우가 다른 시대의 인물을 연기한다는 점은 결국 이 질문이 한 시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다만 방대한 서사를 압축해 무대 위에 올린 만큼, 이야기의 밀도는 아쉬움을 남긴다. 조선과 유럽, 과거와 현재라는 다양한 시공간 배경이 비슷한 비중으로 전개되면서 서사의 호흡이 다소 급하게 느껴진다. 장영실의 행적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예술과 과학의 만남, 그리고 현대적 프레임이 동시에 쌓여간다. 이로 인해 대사가 많아지면서 늘어지고, 이를 라이브로 따라가는 관객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오는 순간도 있다. 소설로 읽는다면 흡수될 법한 정보량이지만, 무대 위에서는 다소 정신없게 느껴질 법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은 배우들의 연기에서 나왔다. 전동석, 카이, 이지수는 각자의 캐릭터를 넘어 작품의 중심축을 단단히 붙잡는다. 복잡한 구조 속에서도 인물의 감정선을 놓치지 않으며 그들의 감정에 동화되게 만들었다.

전동석은 그동안 파멸과 균열의 정서를 지닌 인물들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겨온 배우다. 이번 작품에서 그가 보여주는 장영실은 이전과 달리 비교적 해맑고 애틋한 결을 지닌 인물로, 익숙한 이미지와는 다른 방향에서 새로움을 안겼다. 장영실이라는 인물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섬세하게 쌓아가는 연기가 눈길을 끌었다.

카이는 진석과 세종이라는 두 인물을 통해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는 매개로 기능하며, 작품의 복잡한 구조를 관객이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이지수는 정의공주와 엘레나라는 전혀 다른 두 인물을 명확하게 구분해냈다. 노래와 연기 모두에서 안정적인 중심을 유지하면서도, 조선의 공주와 현대의 이탈리아 유학생 사이의 온도와 리듬을 분명히 달리했다.

결국 '한복 입은 남자'가 관객에게 남기는 것은 장영실의 사라진 행적이 아니라 '우리는 왜 그를 끊임없이 찾는가'라는 질문이다. 작품은 위대한 과학자의 업적을 재현하는 데 중심을 두지 않는다. 장영실의 '비차'는 단순히 하늘을 나는 기계가 아닌, 누구나 하나씩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꿈처럼 느껴진다.



◆ 관객과 함께 완성되는 지금의 '판'

뮤지컬 '판'은 19세기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양반가 자제이나 학문보다 세상사에 관심이 더 많은 '달수'가 희대의 전기수 '호태'를 만나 최고의 이야기꾼이 되는 과정을 그려낸 작품이다.

달수는 양반이지만 과거 시험보다 세상사에 관심이 많다. 19세기 말 조선은 전기수를 탄압했지만 비밀리에 금기 소설이 유통되는 '매설방'이 있었고, 달수는 이덕에게 반해 이곳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다. 그는 금지된 이야기에 빠져들고, 은밀하게 모여들어 통쾌하고 호쾌하게 세상을 풍자하는 이야기꾼이 된다.

전기수가 등장하는 만큼 '판'은 극중극 형식을 띠고 있다. 달수와 호태를 비롯한 이야기꾼들은 꼭두각시놀음, 가면극 등을 활용해 다양한 소설 속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판'은 이야기의 주제만큼이나 형식이 명확한 작품이다. 전기수라는 존재 자체가 관객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만큼, 이 작품은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관객을 '뻐꾸기'라고 칭하며 이야기의 일부로 끌어들인다. 무대 위의 이야기꾼과 객석의 관객이 분리되지 않고, 정말로 그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판'에 함께 한다는 느낌을 만들어낸다.

특히 인상적인 지점은 즉흥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즉석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심지어 관객으로부터 키워드를 받아 이를 구성하는 장면은 공연의 생동감을 극대화했다. 전기수라는 직업이 지닌 재치와 순발력, 그리고 관객과의 호흡을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한 장치로 보였다.

'판'은 배우들이 쉬지 않고 움직이는 공연이다. 노래하고, 연기하고, 몸을 던지듯 무대를 채우는 배우들의 에너지는 이 작품의 가장 큰 감상 포인트 중 하나다. 극중극 구성은 시각적인 즐거움을 더하고, 배우들의 화려한 안무는 그 시대의 전기수가 얼마나 다채로운 퍼포머였을지를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만들었다. 공연 내내 집중력이 유지되며 무대에 몰입할 수 있는 큰 이유로 작용했다. 그중에서도 김대곤 배우의 존재감은 유독 선명했다. 이야기를 밀고 당기는 리듬감, 관객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받아치는 순발력, 그리고 무대를 장악하는 에너지가 전기수라는 역할과 정확히 맞물렸다.

이 작품의 백미는 단연 풍자다. '판'은 과거를 배경으로 하지만, 웃음의 방향은 분명히 현재를 향하고 있다. 이번 시즌에는 지난해의 계엄 사태를 언어유희와 말장난 속에 절묘하게 녹여냈다. 해당 장면들은 웃음을 유발하는 동시에 묘한 카타르시스를 남겼다. 가벼운 표현들로 웃음이 발생하는 지점에는 분명한 현실 인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기수가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니라,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었음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결국 '판'이 말하는 것은 이야기의 힘이다. 금지되었기에 더 날카로웠고, 억눌렸기에 더 통쾌했던 이야기들. 이 작품은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남아 왔다는 사실을 유쾌하게 증명한다. 관객은 어느새 현재의 '판' 위에 서 있고, 그리고 그 판은 지금도 계속 열리고 있다.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EMK뮤지컬컴퍼니, 아이엠컬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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