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드라마’는 왜 일본과 손잡기 시작했나 [Ce:포커스]
- 입력 2026. 02.05. 14:22:22
- [셀럽미디어 전예슬 기자] 글로벌 OTT를 중심으로 한일 합작 드라마가 빠르게 늘고 있다. 한때는 포맷 수출이나 제한적인 협업에 머물렀던 한일 콘텐츠 교류가 이제는 기획 단계부터 제작·후반 작업까지 전 과정을 함께하는 공동 제작 모델로 진화하는 분위기다. 이 변화는 단순한 문화 교류 확대라기보다, 한국 콘텐츠 산업이 직면한 구조적 변화와 맞닿아 있다.
(시계방향으로) '이 사랑 통역 되나요?',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첫사랑 도그즈', '로맨틱 어나니머스'
제작비가 바꾼 시장 지도
한국 드라마와 영화 산업은 최근 몇 년 사이 급격한 변곡점을 맞았다. OTT 확산으로 콘텐츠 소비는 늘었지만 제작 편수는 오히려 감소했다. 지상파 미니 시리즈와 일일·주말 드라마 편성은 대폭 축소됐고, 영화 시장 역시 제작비 부담과 관객 감소가 겹치며 중·소규모 작품이 설 자리를 잃었다.
이 같은 변화의 핵심에는 제작비 상승이 있다. 특히 배우 출연료 인플레이션은 제작 구조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방송사와 OTT를 오가며 형성된 ‘전작 기준’이 반복적으로 상향되면서 출연료의 기준선 자체가 과거와는 다른 수준으로 올라갔다. 글로벌 OTT가 출연료 상한선을 도입했지만 이미 시장 전반의 비용 구조는 크게 흔들린 뒤였다.
제작비 부담은 투자 논리도 바꿨다. 과거처럼 일정 편성을 채우기 위해 다양한 작품을 시도하기보다, 흥행 가능성이 검증된 프로젝트에만 투자가 몰리는 구조가 됐다. 네임밸류가 확실한 배우와 감독, 작가 중심의 제작이 일반화되면서 신인과 미들급 인력이 성장할 수 있는 통로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 OTT 역시 한국 단독 제작에 대한 접근 방식을 조정하고 있다. 한국 콘텐츠는 여전히 세계 시장에서 영향력이 크지만 평균 제작비가 지나치게 높아진 상황에서 모든 프로젝트를 감당하기에는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일본이라는 ‘현실적인 선택지’
이 지점에서 일본 시장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일본은 한국보다 방송·콘텐츠 시장 규모가 크지만 제작 구조는 상당히 다르다. 특히 배우 출연료 체계에서 차이가 뚜렷하다. 일본은 광고 중심의 산업 구조로 인해 배우의 지속적인 노출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그 결과 주연급 배우의 출연료가 한국보다 훨씬 낮은 수준에 형성돼 있다.
이 같은 구조는 글로벌 OTT와 제작사 입장에서 매력적인 조건이다. 한국 배우와 제작 시스템의 경쟁력을 유지하면서도 일본 배우와 현지 인프라를 활용해 전체 제작비를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국이 강점을 가진 기획력과 연출, 빠르고 체계저인 후반 작업 시스템이 결합되며 시너지가 만들어진다.
최근 공개된 한일 합작 드라마들은 이러한 전략이 일정 부분 효과를 거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에서 리메이크돼 공개된 ‘내 남편과 결혼해줘’는 현지 OTT 플랫폼에서 흥행 성과를 기록하며 한국 드라마 IP의 확장 가능성을 입증했다. 또한 한국과 일본 배우가 함께 출연한 ‘이 사랑 통역 되나요?’와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은 양국 시청자들 사이에서 비교적 긍정적인 반응을 얻으며 한일 합작 콘텐츠에 대한 진입 장벽을 낮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와 함께 ‘로맨틱 어나니머스’, ‘첫사랑 도그즈’ 등도 잇따라 공개되며 한일 합작이 단발성 프로젝트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제작 방식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직 공개를 앞둔 ‘메리 베리 러브’ 역시 기획 단계부터 한일 협업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으로 글로벌 OTT가 이 제작 방식을 중장기 전략으로 검토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성과를 거둔 작품과 후속 프로젝트가 동시에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한일 합작이 단순한 비용 절감 차원을 넘어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제작 모델로 실효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해석된다.
확산되는 공동 제작, 남은 과제
한일 합작 흐름은 드라마에 국한되지 않는다. 예능과 다큐멘터리 분야에서도 공동 제작 사례가 늘고 있고, 방송사 역시 해외 채널과 직접 손잡고 제작에 나서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제작비 부담을 분산시키는 동시에 현지 유통망을 자연스럽게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동 제작의 장점은 분명하다.
다만 이 흐름을 마냥 긍정적으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한일 합작이 늘어날수록 한국 단독 제작 환경은 더 위축될 수 있고, 일본 시장 중심의 재편이 가속화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또한 일부 작품은 사전 화제성에 비해 현지 시청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문화적 차이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녹여내느냐가 여전히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글로벌 OTT와 제작사들이 한일 합작을 주요 전략 중 하나로 삼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제작비 인플레라는 구조적 문제 속에서 공동 제작은 더 이상 실험이 아닌, 현실적인 선택지로 자리 잡고 있다.
업계의 시선
업계 관계자들은 한일 합작을 한국 콘텐츠 산업의 위기이자 전환점으로 보고 있다. 한 관계자는 “한일 합작은 비용을 줄이기 위한 임시방편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을 전제로 한 제작 방식이 굳어지고 있다”라며 “특히 중간 규모 작품일수록 이 모델이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 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한국이 단순한 콘텐츠 공급국을 넘어 기획·제작·후반 작업 전반을 아우르는 파트너로 인식될 수 있는 기회”라며 “동시에 한국 내부 제작 생태계가 더 위축되지 않도록 제도적·구조적 논의가 병행돼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제작비 인플레 시대, 한일 합작은 선택이 아닌 흐름이 됐다. 이 흐름이 한국 콘텐츠 산업의 새로운 서장 경로가 될지, 또 다른 의존 구조로 남을지는 이제부터가 관건이다.
[셀럽미디어 전예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넷플릭스, 쿠팡플레이, BH엔터테인먼트, TBS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