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래 없는 뮤지컬? '라이프 오브 파이'와 '센과 치히로'의 장르적 딜레마 [Ce:포커스]
- 입력 2026. 02.05. 16:50:30
-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이쯤에서 노래가 나오려나 생각하며 봤어요"
'라이프 오브 파이'-'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라이프 오브 파이'의 관람 후기에는 이와 같은 글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동시기에 공연중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라이프 오브 파이'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현재 국내 티켓 예매 사이트에서 '뮤지컬'로 분류돼 판매되고 있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배우가 넘버를 부르지 않고, 해외에서는 연극으로 분류된다.
이처럼 장르적 성격이 분명한 작품들이 국내에서만 다른 이름을 얻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왜 뮤지컬 아닌 연극인가
각 제작사에 따르면 '라이프 오브 파이'는 '라이브 온 스테이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스테이지'로 소개되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연극'이나 '뮤지컬'로 장르를 정의하지 않고 있다.
물론 두 작품 모두 일반적인 연극과 다른 지점은 존재한다. 먼저 '라이프 오브 파이'의 가장 큰 차별점은 퍼펫 기술에 있다. 퍼펫티어들은 극 중 동물 캐릭터인 나비, 오랑우탄, 얼룩말, 바다 거북이, 벵골 호랑이 등을 소리, 움직임을 통해 표현하며 리얼함을 더한다. 더불어 무대에 구현되는 스크린 영상과 무대 장치 등을 통해 병실, 바다 등의 작품 배경을 자유자재로 바꿔 표현한다. 이와 같은 특징을 보면 전통적인 연극과는 조금 다른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무대 위에 뮤지컬에 버금가는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배치한다. 하지만 극 중 등장하는 세 곡은 극의 분위기를 극대화하거나 장소 구분을 위한 장치로 사용될 뿐, 흔히 뮤지컬 배우들이 부르는 넘버가 아니다. 또한 이 작품에서도 퍼펫과 퍼펫티어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가마 할아범'이나 '가오나시'처럼 원작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캐릭터들을 무대 위 배우들이 직접 움직이고 연기한다.
이처럼 두 작품은 분명 기존의 '연극'으로 구분하기에는 어려운 지점에 서 있다. 그러나 뮤지컬로 규정하기에는 노래나 군무로 서사를 이끈다는 형식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
◆ 왜 국내에서만 뮤지컬이 됐나
그렇다면 두 작품이 국내 티켓 예매 사이트에서 '뮤지컬'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결국 작품의 성격보다는 한국 공연 시장의 유통 구조와 연결돼 있다.
현재 국내 주요 티켓 예매 사이트들은 작품 등록 시 제작사나 극장이 직접 장르를 선택할 수 있다. 그렇기에 제작사들은 자연스레 작품의 노출도를 감안하게 된다.
인터파크, 예스24 등 사이트를 보면 메인 화면에서 뮤지컬 카테고리가 가장 앞에 배치돼 있다. 첫 화면에서 연극보다 눈에 띄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제작사 입장에서는 뮤지컬 분류가 사실상 가장 효율적인 선택이 된다.
가격 역시 중요한 요인이 된다. '라이프 오브 파이'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극장의 규모를 비롯해 무대 장치, 기술 등으로 인해 제작비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국내 공연의 가격대(VIP석·R석 기준)는 대극장 뮤지컬 평균 15~17만원, 연극은 9~12만원으로 형성됐다.
그렇기에 뮤지컬보다 연극의 형식에 가까워도 높은 티켓값을 측정하기 위해서 뮤지컬로 분류하는 방식이 반복되는 셈이다. 공연계 관계자 A씨는 "관객들에게 '연극은 뮤지컬보다 싸다'는 인식이 기본적으로 들어있다"며 "해당 가격대로 관객들의 부담을 낮추기 위해서는 평균적으로 가격이 높은 뮤지컬로 분류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유통 구조가 곧바로 관객의 납득으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 최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반복 관람하고 있는 관객 B씨는 "공연에서 암전도 거의 없이 배우들이 뛰어다닌다. 그래서 높은 티켓값이 측정되는 부분은 이해가 된다"면서도 "연극을 뮤지컬로 분류해서 가격을 높이려는 부분은 소비자 기만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결국 작품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장르적 정체성은 부차적인 요소로 밀려나게 됐고, 이는 얼마나 많은 관객에게 노출되고 어떤 가격으로 소비될 수 있는지가 먼저 고려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뮤지컬이라는 이름은 작품을 설명하는 장르라기보다 판매를 위한 선택지로 기능하게 됐다.
◆ 장르=정보…잘못된 분류가 남기는 혼란
이 같은 장르 분류의 혼란은 관객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된다. 실제로 두 공연의 감상평 게시판에 '뮤지컬이라고 속인 연극', '노래가 안 나오는데 왜 뮤지컬인가요'와 같은 반응이 쏟아지는 것처럼 실제 공연 내용이 장르와 부합하지 않을 경우는 관객들의 혼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공연 시장의 통계지표에도 영향을 미친다. 뮤지컬, 연극과 같은 장르 구분은 공연 시장을 분석하는 기초 데이터에도 활용되는 바. 연극으로 제작된 작품이 뮤지컬로 분류돼 소비될 경우, 데이터 전반에도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물론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융복합 공연이 늘어나는 흐름 자체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는 분류 체계가 나오지 않는 것에 있다. 현재의 방식이 지속될 경우, 지금과 같은 문제가 반복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지금 필요한 것은 '연극이냐, 뮤지컬이냐'의 이분법적 논쟁이 아니다. 변화하고 있는 공연의 흐름을 정확히 반영할 수 있는 장르 분류 기준에 대한 고민이다. 관객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공연 시장의 안정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라도 장르 표기의 기준에 대한 재정비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됐다.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에스앤코, CJ ENM, TOHO Theatrical Dept.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