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캐빈'·'은하철도의 밤'으로 본 부성애의 세 얼굴 [공연 VS.]
입력 2026. 02.09. 16:21:17

'로빈'-'캐빈'-'은하철도의 밤'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추운 겨울, 대학로에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온기를 전하고 있는 세 작품이 있다. 뮤지컬 '로빈', '캐빈', '은하철도의 밤' 모두 아버지의 사랑을 중심 축으로 삼고 있다.

세 작품은 시대적 배경, 서사와 형식 모두 다르지만 공연을 관통하는 정서는 닮아 있다. 바로 다정한 말보다 선택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아버지의 사랑이다.

아버지는 자식을 향한 사랑을 따라 움직이고, 그 선택은 세 작품 속 서사의 방향을 결정짓는 힘으로 작용한다. 결국 이 작품들은 묻는다.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가 아니라 어떤 선택으로 남는가를.



◆ '로빈'이 그리는 새로운 가족의 얼굴

뮤지컬 '로빈'은 우주 벙커라는 독특한 배경을 토대로 가족의 사랑과 갈등을 따뜻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과학자 로빈은 딸 루나, 로봇 레온과 함께 지구의 방사선 피폭을 피해 우주 벙커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 벙커의 수명은 10년, 지구를 떠나온 지 10년 가까이 되는 시점에 로빈은 다행히도 지구로부터 귀환 신호를 받게 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로빈은 지구로 귀환하기까지 일주일은 남겨두고, 자신의 수명도 일주일 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로빈은 어린 딸을 홀로 지구로 보내야 하는 상황에 자신을 복제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로빈'이 신선한 이유는 SF라는 장르적 외피 속에 가족 드라마를 자연스럽게 녹여냈다는 점이다. 우주 벙커라는 설정은 흔한 배경이 아니고, 방사선으로 황폐해진 지구를 피해 10년간 그곳에 갇혀 살아야 했다는 설정만 보면 이야기는 충분히 암울해질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은 절망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그 시간을 함께 버텨온 세 존재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춘다. 로빈과 딸 루나, 그리고 로봇 레온이 있었기에 가능한 시간이었다는 점이 서사 전반에 조용히 스며들어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아빠와 딸이 아닌 로빈과 레온의 관계다. 로빈은 레온을 단순히 자신을 보조하는 로봇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인식한다. "잊지 마, 너도 내 소중한 아들이야"라는 대사는 '로빈'이 말하는 가족의 범위를 분명히 보여준다. 혈연이나 종을 기준으로 한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를 넘어, 함께 살아온 시간과 정서적 유대가 가족을 만든다는 메시지가 자연스럽게 전달된다.

무엇보다 로빈이라는 캐릭터가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배우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로빈' 역은 현실에서도 딸을 둔 아버지인 배우들로 캐스팅됐다고 알려졌다. 이 때문에 무대 위 로빈은 현실적인 부성애와 많이 닮아 있다. 배우 최재웅은 딸을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무뚝뚝하고 서툴러서 표현에는 익숙하지 않은 태도를 잘 표현해낸다. 특히 사춘기에 접어든 딸을 대하는 미묘한 거리감은 현실적인 공감을 자아낸다.

뮤지컬, 연극 등은 때로 가족 단위 관객에게 다소 부담스럽거나 어려운 장르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로빈'은 세대에 관계없이 함께 감상하기에 적합한 작품이다. 어렵지 않은 서사 속에 담긴 따뜻한 메시지와 정서가 공연장을 나선 뒤에도 오래 남는다. 통통 튀는 SF 장르로 시작해 결국 가족의 따뜻함으로 마무리되는 이 작품은, 지금 이 순간 가족과 함께 극장을 찾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



◆ '캐빈', 스릴러의 외피를 쓴 상실과 용서

뮤지컬 '캐빈'은 쏟아지는 태풍 속, 낡은 오두막에서 눈을 뜬 기자 '데이'와 제약회사 직원 '마이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자 데이와 제약회사의 불법 비리를 세상에 알린 내부고발자 마이클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낯선 오두막에 갇힌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밀실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온전히 의지하게 된다.

그러던 중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름 J가 계속해서 언급되고, 책상 서랍 속에서 단서가 발견된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혼란에 빠지고, 의심의 씨앗은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대체 이 공간은 어디인지, 누가 이들을 가두었는지, 두 인물의 치밀한 심리전과 팽팽한 긴장감을 통해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뮤지컬 '캐빈'은 표면적으로는 심리 스릴러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작품이 진짜로 도달하는 지점은 긴장이나 공포가 아닌 상실 이후의 죄책감과 용서, 그리고 회복에 가깝다. 반전이 거듭될수록 이 작품은 잔잔한 힐링극의 얼굴을 드러낸다.

데이라는 인물이 잭의 또 다른 인격이라는 설정은 이 작품의 정서를 단번에 뒤집는다. 여기에 마이클로 등장한 인물 역시 캐빈의 아버지이자 정신과 의사인 행크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이야기는 개인의 트라우마를 넘어 부성애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행크는 잭을 쉽게 용서하지 못하지만, 캐빈이 남긴 편지는 이 관계의 방향을 바꾼다. 아버지와 화해하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잭이라는 좋은 친구를 만났다는 고백은 행크가 다시 잭을 찾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결국 '캐빈'은 죄책감에 갇힌 한 사람을 구하는 이야기이자,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다시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아버지의 따뜻함과 강인함이 동시에 드러나는 지점이다.

연출 역시 작품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한다. 무대 위에는 의자와 책상, 서랍장 등 최소한의 세트만이 놓여 있지만, 천장 LED와 조명 연출이 인물의 심리를 섬세하게 확장한다. 특히 천장 조명은 잭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며 관객들의 몰입도를 높인다. 일반 조명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또한 인물의 이중성과 숨겨진 의미를 암시하며, 단순한 공간을 심리의 무대로 변주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긴장감을 완성하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두 인물은 극 중에서 일종의 1인 2역에 가까운 부담을 안는다. 이날 무대에 오른 홍성원, 윤석원 배우는 겉으로 드러나는 이야기와 숨겨진 서사 사이의 경계를 섬세하게 오가며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캐빈'은 결국 묻는다. 용서란 무엇인지, 그리고 누군가를 잃은 뒤에도 사람은 다시 손을 내밀 수 있는지. 그 질문의 중심에는 아들의 마음을 안고 타인의 삶까지 구해내는 한 아버지의 선택이 놓여 있다.



◆ '은하철도의 밤', 기억 속에 남아 아이를 이끄는 존재

뮤지컬 '은하철도의 밤'은 일본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원작인 미야자와 겐지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창작 뮤지컬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년 '조반니'가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 '캄파넬라'와 함께 사라진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은하수 여행을 떠나는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조반니는 어린 시절 시력을 잃고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중 유일한 친구 캄파넬라를 오랜만에 만나게 되고, 캄파넬라는 생생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던 중 조반니는 은하 축제에서의 사고를 계기로 은하 열차에 탑승한다. 친구 캄파넬라는 승무원 캄파넬로, 고고학자 캄파넬리, 새잡이 캄파넬루, 동승자 캄파넬리우스 등 다양한 인물로 변신하며 조반니의 은하 여행을 돕기 시작한다. 이 여정을 통해 조반니는 어떤 기억을 마주하게 될까.



'은하철도의 밤'은 겨울이라는 계절과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차가운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은하수를 따라 여행을 떠나는 이 이야기는 관객에게도 자연스럽게 힐링을 건넨다. 공연 시작 전 안내멘트가 끝난 뒤 "승객 여러분의 오늘 하루는 어떠셨나요? 좋지 않았던 일들 모두 이 열차에 내려놓으시고, 여행이 끝난 뒤 좋은 기억들만 가지고 돌아가시길 바랍니다"라는 멘트는 이 작품의 정서를 압축한다.

작품은 은하 여행이라는 설정을 통해 별자리 신화를 하나씩 풀어낸다. 각 정차역마다 등장하는 신화는 넘버로 구현되며, 각 넘버마다 분위기와 결이 모두 다르다. 서정적인 곡부터 밝고 경쾌한 곡까지 구성돼 각 넘버의 변화가 여정의 리듬을 다채롭게 만든다. 또한 신화를 단순히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반니의 기억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방식도 흥미롭다.

무대 위에는 다섯 개의 박스만이 놓여있다. 하지만 두 배우는 이를 쉼 없이 움직이며 수많은 공간과 인물을 만들어낸다. 각 넘버마다 이어지는 안무와 동선은 배우의 집중력과 체력을 동시에 요구한다. 이날 무대에 오른 정지우 배우는 조반니 캐릭터와 잘 맞는 음색과 넘버 소화력으로 안정감 있게 극을 이끌었고, 특히 자넬리를 연기할 때 목소리 톤 조절을 능숙하게 해내 눈길을 끌었다. 주민진 배우는 여러 캐릭터를 넘나들며 극의 리듬을 살렸다. 특히 새잡이 캐릭터에서는 배우 특유의 장점인 애드리브가 극에 생기를 더했다.

'은하철도의 밤'은 조반니가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는 이야기지만, 그 여정의 중심에는 캄파넬라가 있다. 친구이자 안내자인 캄파넬라는 사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상상의 존재다. 조반니에게 건네는 "잘해낼 거야. 지금껏 그래 왔듯이"라는 대사는 단순한 응원이 아니다. 직접 곁에 있을 수는 없지만, 아이가 스스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마음 속에 남겨둔 아버지의 목소리에 가깝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부성애는 보호하거나 이끌어주는 형태가 아닌 곁에 남아주는 방식이다. '은하철도의 밤'은 그렇게 부재 속에서도 이어지는 사랑을, 조용하고 따뜻한 은하 여행으로 완성한다.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쇼플레이, 이모셔널씨어터, 더블케이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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