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진스, 민희진, 그리고 템퍼링
- 입력 2026. 02.20. 12:40:25
- [유진모 칼럼] 가요 제작자들의 모임인 사단법인 한국연예제작자협회(연제협)에 이어 사단 법인 한국음악콘텐츠협회(음콘협)도 하이브와 민희진 전 어도어 대표(현 오케이 레코즈 대표)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주 간 계약 효력 및 해지와 관련된 1심 판결에서 재판부가 민 대표의 손을 들어 준 것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나섰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1부(부장판사 남인수)는 지난 12일 민 전 대표가 하이브를 상대로 제기한 주식 매매 대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를 판결했다. 하이브가 민 전 대표를 상대로 제기한 주주 간 계약 해지 확인 소송은 기각했다. 재판부는 "하이브는 민 전 대표에게 255억 원 상당의 풋 옵션 대금을 지급하라."라고 명령했다. 민 전 대표의 측근으로 분류된, 함께 소송을 제기한 신모 전 부대표에게 17억 원을, 김모 전 이사에게 14억 원 상당을 각각 지급할 것을 함께 명했다.
이에 연제협은 지난 13일 성명을 내고 “본 협회는 그간 전속 계약 해지 논란과 탬퍼링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계약과 신뢰가 무너지면 산업의 근간이 흔들린다.’라고 거듭 경고해 왔다. 이번 판결이 현장의 불안을 잠재우기는커녕 불신을 조장할까 우려된다.”라고 밝혔다.
이어 “이번 판결이 탬퍼링을 획책했더라도 실행에 옮기지 않았거나 실행 전 발각되었다면 면죄부를 줄 수 있다는 식의 위험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탬퍼링은 단순한 계약 분쟁이 아니라 공동의 결과물을 찬탈하려는 행위이자 산업의 신뢰를 뿌리째 뽑는 파괴적 행위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항소심 등 향후 절차에서 사법부가 업계의 특수성과 제작 현장의 현실을 깊이 통찰해 주기를 강력히 촉구한다. 신뢰를 기반으로 성립하는 계속적 관계에서 그 신뢰가 무너졌을 때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명확한 법적 경계가 제시돼야 한다. 그래야만 제작자들이 다시 사람을 믿고 자본을 투여하며, 다음 세대의 아티스트를 키워 낼 수 있다.”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음콘협도 20일 "오늘날 전 세계의 주목과 찬사를 받는 K-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자본 투자자와 역량 기여자 간 상호 신뢰를 토대로 성장해 왔다. 투자 없이 재능은 꽃피우기 어렵고, 역량 기여 없는 투자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규모가 크든, 작든 필수적인 협업 관계이기 때문이다."라며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K-팝 산업의 핵심은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초기 단계에서 기획사가 막대한 선투자와 리스크를 감수하는 대신 이후 실현되는 성과를 계약과 신뢰 관계 속에서 함께 나누는 구조에 있다. 그 구조가 흔들리면 산업의 지속 가능성 역시 심각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또 "대표 이사의 직무 수행에 있어 상법이 요구하는 회사 및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가 탬퍼링과 공존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계약 질서도, 투자 환경의 안정성도 근본적으로 부정되면서 K-팝 산업이 설 기반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두 단체가 공통적으로 우려한 것은 템퍼링 문제이다. 전 세계의 선진형 연예계 시스템 중에서 유독 대한민국이 템퍼링 혹은 배신행위에 대한 논란과 법정 투쟁이 잦다. 물론 이는 불과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연예 기획사나 각종 콘텐츠 제작사가 주먹구구식 경영을 해 왔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심한 것은 사실이다.
그 배경은 시스템의 부재라고 할 수 있지만 결국 상호 신뢰 구축의 문제였다. 구체적으로 보면 신인 연예인의 경우 적지 않은 사람에게 '일단 소속사에 무조건 복종하자. 스타덤에 오른 다음에 엄청난 계약금 받고 다른 회사로 옮기면서 기존 회사에 약간의 위약금만 물면 된다.'라는 의식이 팽배했다.
제작사나 제작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대다수의 제작자는 자신의 돈과 애정과 노력을 쏟아부어 신인을 스타로 키우는 데 대해 경제적인 성공의 희열을 느끼면서 그만큼의 성취감도 만끽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부 장삿속만 앞세운 업체나 제작자는 '돈 놓고 돈 먹기' 식으로 다른 제작자가 애써 키운 스타를 별 노력 없이 자본만으로 빼앗아 배를 불리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다.
여기에 양심이 부족하거나, 신뢰에 무디거나, 오직 돈만 밝히는 몰지각한 연예인이 휩쓸리고 그럼으로써 템퍼링이 업계를 넘어 사회적 문제점으로 부각된 것이다. 이 시대는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주도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주인이다.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대표적인 이념은 자유, 평등, 평화이다. 자본주의라고 무조건 돈의 편을 드는 건 아니다.
그 이념에도 질서와 법도라는 게 엄존한다. 하다못해 재래시장이나 노점 상인들 사이에도 상도의라는 도덕률이 있다. 자본주의가 적용되든, 민주주의가 반영되든 법과 질서라는 준거틀이 있다. 무리를 이루고 사는 동물들에게도 법도는 있다. 사자의 경우 암사자들이 합동 사냥한 뒤 우두머리 수컷이 제일 먼저 먹는 게 순서이다.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는 사람이 만약 법과 질서와 양심과 실력보다 오직 권모술수만 앞세워 이득을 취한다면 벌레와 다를 게 무엇인가! 재판부가 민 전 대표의 풋 옵션을 인정해 준 것과 템퍼링 문제를 간과한 것은 연관이 없지 않지만 차원은 다르다.
앞뒤 정황으로 볼 때 굳이 업계 관계자가 아니더라도 연예계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이라면 템퍼링의 상황은 감지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민 전 대표의 경우 그런 욕심이 날 수도, 그런 자격이 있다고 자부할 수도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뉴진스를 만들고 성공시킨 주인공이 그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영국의 산업 혁명 이후 인간은 전문화되었고, 업무는 분업화되었다. 학문도 수없이 분화되며 자식을 낳았다. 수학도, 심리학도, 모든 학문이 철학의 자식이듯. 즉 민희진이라는 프로듀서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은 하이브의 자본과 시스템, 그리고 뉴진스를 이룬 연습생이라는 자원 등에 있다. 이 모든 것이 지원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한 프로듀서가 뛰어난 아이디어를 창출한다. 그러나 기획사의 자본이 투입되지 않는다면 작사자, 작곡자, 편곡자, 뮤직 프로듀서, 뮤직비디오 감독, 의상 디자이너, 헤어 디자이너, 안무가 등을 고용할 수 없다. 뮤지션의 정체성과 그의 앨범을 완성할 수 없다. 아무리 뛰어난 기획력일지라도 자본이 없으면 제작될 수 없고, 소비자가 없으면 완성될 수 없다.
연제협은 한국 가요 제작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하고, 음콘협은 한국 음악 콘텐츠를 발전시키고 저작권 침해를 방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K-팝의 세계화에 이바지했고, 현재 발전과 존속에 큰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정체성만 놓고 본다면 그들은 자본가인 하이브보다 제작자인 민 전 대표의 편에 서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템퍼링 문제이다. 민 전 대표가 강한 템퍼링 의지를 가졌든, 그렇지 않았든 그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두 단체가 명명백백하게 그런 행보가 보였다고 확신하고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그들은 가요계에서 민 전 대표보다 더욱 오랫동안, 그리고 더 많은 산전수전을 겪은 전문가 중의 전문가이다.
만약 그들의 주장이 얼토당토아니하다면 사법부는 정체성을 의심하고 존폐론을 따져야 할 터이다.
[유진모 칼럼 / 사진=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