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해준, ‘휴민트’로 보여준 또 다른 얼굴 [인터뷰]
- 입력 2026. 02.24. 13:14:49
- [셀럽미디어 전예슬 기자] 배우 박해준은 영화 ‘휴민트’(감독 류승완)에서 한 겹 더 차가운 얼굴을 꺼내든다. 블라디보스토크 북한 총영사 황치성. 그는 권력과 욕망에 충실한 인물이지만 그 힘은 단순한 악의 과시가 아니라 균열을 품은 불안에서 나온다. 의심이 습관이 된 사람, 그리고 그 의심을 권력으로 덮어두려는 사람. 황치성은 그런 종류의 빌런이다.
'휴민트' 박해준 인터뷰
‘휴민트’는 비밀도, 진실도 차가운 얼음 바다에 수장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이들이 격돌하는 이야기다. 국정원 요원 조 과장 역의 조인성, 북한 보위성 조장 박건 역의 박정민, 북한 식당 종업원 채선화 역의 신세경과 함께 박해준은 한 고안에서 다른 결의 온도를 만들어내는 앙상블의 한 축을 맡았다.
류승완 감독과의 첫 작업은 그에게도 ‘기대’가 먼저였던 듯하다. 이름만으로도 현장을 상상하게 하는 감독, 그리고 그 현장에 들어섰을 때 체감되는 리듬이 있었다. 박해준은 제안을 받던 순간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유명한 감독님이시잖아요. 누구나 다 작업하고 싶어 하는 감독님 중 한 분이고요. ‘예전부터 하고 싶었다, 기회를 보고 있었다’라고 말씀 해주시니까 너무 영광스럽고 기분이 좋았어요. 거기다 정민이, 인성 씨랑 같이 한다고 했을 때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황치성은 자칫하면 전형적인 빌런으로 소비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박해준은 이 인물이 ‘선을 타야’만 살아난다고 봤다. 처음엔 냉혈한처럼 직진하되 중간엔 흔들려야 하고, 마지막에는 몸을 던져야 한다. 감정선의 톤을 잘못 잡으면 인물이 납작해지고, 너무 과하면 설득력이 무너지기 때문.
“저는 한 번 사람이 믿어지면 그 현장에서 하나하나 만들어 가면 되겠다는 생각을 해요. 제가 틀리면 감독님이 말씀해주겠지, 잘하면 ‘더 살리자’고 말씀해주시겠지라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하면 부담을 잘 안 가지는 편이죠. 좋은 감독님들이 저와 작업해보면 후회는 안 하시는 것 같아요. 하하. 현장 적응력이 굉장히 좋고, 감독님이 요구하는 대로 아주 뱀처럼 잘 바뀌는 배우죠.”
이런 균형감은 류승완 감독의 주문과도 맞닿아 있다. 류 감독은 ‘휴민트’에서 기교를 덜어내고, 상황을 충분히 구성하는 방식으로 인물의 선택을 밀어붙인다. 박해준 역시 “멋있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감독의 방향을 받아들인 뒤 악당을 바라보던 시선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작품이 다르고, 감독님이 다르고, 대본이 다르면 그것만으로도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했던 것을 소비하는 악역도 있고요. 감독님과 처음 하면서 조금 부담이 된다고 얘기를 드렸어요. 감독님께서 충분히 많은 설명을 해주시면서 ‘이 역할은 굉장히 힘이 있고, 고지식하기도 하고, 고급스러운 악당이 되기에 멋있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하셨죠. 악당이 어떻게 멋있게 보여지나를 생각했던 걸 많이 바꿔놓으신 것 같아요.”
이에 류승완 감독은 참고작을 건네며 인물의 결을 더 구체화했다. 한 편 한 편이 ‘답’이라기 보다는, 방향을 바꾸는 자극이었다. 박해준은 그중 인상 깊게 남은 한 작품을 꺼내 들며 악의 표현이 꼭 ‘폭발’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추천해주신 영화가 있어요. 한 30편을 추천해주셨지만 싹 다 보진 않았죠. (웃음) ‘대체 이 영화를 왜 보내주신 거지?’ 하면서 한 작품을 봤어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크리스토프 왈츠 배우를 예로 들어주셨죠. 그 역할이 되게 무서워요. 그 사람의 기본적인 태도를 보면 굉장히 노련하고, 계속 미소를 띠우면서 즐기는 듯한, 그러면서 비열한 느낌이 많더라고요. 고이장히 공포스러울 정도로 말끝이 칼날 같았어요. 여러 면들을 예로 들면서 참고했죠.”
류승완 감독의 액션은 동작보다 상황이 먼저다. 그래서 글로 보면 황당한 장면도 화면에서는 인물의 성향과 감정으로 설득된다. 박해준은 그 믿음이 생기면 오히려 부담이 줄어든다고 했다. 감독이 이미 장면의 논리를 설계해두고, 배우는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면 된다는 확신. 그 확신이 ‘류승완 현장’의 체감이라고 말했다.
“감독님 작품은 시나리오보다 훨씬 더 좋게 나왔어요. 믿음이 있으니까 작업할 때 더 애정이 들고, ‘이래서 류승완 감독님이라고 하는 구나’를 느꼈죠.”
황치성을 입체적으로 만든 건 의외로 현장의 변수였다. 박해준은 인물을 고정시키기보다 매일의 컨디션과 공기, 날씨가 주는 감각을 그대로 가져갔다. 그 변화가 허용되는 캐릭터라는 판단이 있었고, 그래서 매일 조금씩 다른 황치성이 가능했다.
“매일매일 달랐어요. 시간, 날씨, 기후에 따라 컨디션이 달랐죠. 황치성은 그래도 되는 인물이라 오히려 더 인물이 다채롭게 보일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어요. 그냥 던져지는 경우가 있었던 것 같아요. 대본을 외웠고, 제가 뭘 해야 할지만 알면 던져지는 경우가 있었죠. 제가 던져놓으면 다른 사람이 리액션하는 걸 받아서 해야 할 경우가 있기도 했어요.”
해외 촬영은 배우의 시간이면서 동시에 가장의 시간이었다. 그는 두 달 정도 집을 비웠고, 짧지 않은 공백이 가족에게 남긴 감정이 어떤 것인지 고스란히 전했다. 이국의 현장에서 액션을 찍고, 밤엔 영상통화로 ‘아빠의 자리’를 채워야 했다. 그래서 그의 블라디보스토크 체류는 영화 속 도시만큼이나 차갑고, 또 인간적이었다.
“가족들 걱정이 좀 많았어요. 저는 두 달 정도 있었는데 짧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이니까요. 애들이 조금 컸다고 해도 와이프가 걱정되곤 했죠. 촬영한다고 가니까 아이들이 많이 울기도 했어요.”
아이들은 적응했고, 그 적응은 때론 서운함으로 다가온다. 박해준은 그 순간을 웃으며 털어놓았지만 문장 사이엔 마음이 묻어났다. 전화가 부담이 되는 아이들을 붙잡기 위해 통화 대신 놀이를 선택했다. 아빠의 부재를 게임으로 채운 셈이다.
“일주일 전부터 안 가면 안 되냐고. 작은 놈은 가기 전부터 몇 번이고 울었는데 첫째는 제가 떠나고 나서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엄청 참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나이가 좀 찼는데 불구하고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서 매일 영상통화를 하고 아빠의 빈자리를 느끼지 않게끔 계속 관심을 가졌는데 보름쯤 지났나. 애들이 제 전화를 받으면 끊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렇다고 통화를 또 안할 순 없으니 마냥 전화 통화를 하면 안 되겠구나, 전화로 놀이를 해야겠다 싶어 스무 고개 같은 걸 했어요.”
짧은 텀으로 여러 작품을 선보이는 흐름에 대한 질문에는 태도가 먼저였다. 작품이 좋으면 하고, 이후 반응은 감사로 받는다. 커리어의 전략이라기보다 연기라는 일 자체를 놓치지 않기 위한 선택이다. 박해준은 그 단순함이 오히려 지금의 변신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했다.
“저는 계산을 잘 못해요. 그런 계산을 잘 했어야 했나? 싶은데 대본 좋고, 하고 싶으면 하고. 그 이후에 일어나는 건 역할에 충실하게 잘 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해요. 연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죠.”
흐름이 좋다는 주변의 말에도 그는 방심하지 않았다. 인정받을수록 불안해진다는 감각. 그 불안이 그를 더 깊은 고민으로 밀어 넣는다. ‘잘 되고 있다’는 확신보다 ‘더 단단해져야 한다’는 질문이 먼저 떠오르는 시간. 박해준은 그 시간을 “나 자신을 부여잡는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주변에서 저한테 해주시는 것 보면 체감이 안 될 순 없어요. 저를 배우로서 인정해주시고 많이 도와주신 분들이 많다는 건 알 수 있죠. 그런데 너무 모자란 부분이 많고, 더 불안할 수 있어요. 제가 저 자신을 부여잡고 배우로 조금 더 깊이 고민하지 않으면 큰일나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는 시간이죠.”
[셀럽미디어 전예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NEW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