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을 자처한 소녀 '홍련', 13만 9998번째 재판의 결말은
입력 2026. 03.18. 18:12:33

홍련

[셀럽미디어 임예빈 기자] 이 리뷰는 뮤지컬 '홍련'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버림받고 천도정에게도 거부당한 한 소녀가 있다. 저승을 떠돌며 다음 생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오늘 우리에게 13만 9998번째 질문을 던진다.

"지금부터 혼백 배홍련의 재판을 시작한다"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 천도정의 재판장이 차려졌다. 재판관은 바리, 검사는 삼차사, 그리고 피고는 홍련이다.

뮤지컬 '홍련'은 한국의 전통 설화 '장화홍련전'과 '바리데기 설화'를 결합해 만들어졌다. 홍련과 바리가 저승의 천도정에서 만난다는 설정에 동양의 씻김굿에서 착안한 선율, 파격적인 록 음악, 그리고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더해 친숙하면서도 낯선 작품이 탄생했다.

'홍련'은 2022년 CJ문화재단 스테이지업 최종 지원작으로 선정돼 개발 과정을 거쳐 지난 2024년 초연으로 관객들을 만났다. 초연 당시 예매처 평점 9.9점, 평균 객석 점유율 99.6%라는 성과를 거두며, 중국 광저우와 상하이에 진출하는 성과를 달성했다. 뿐만 아니라 제9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작품상(400석 이하)을 거머쥐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제목은 친숙한 '홍련'이지만, 천도정 한 가운데 서 있는 그는 우리가 알던 '장화홍련전' 속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보랏빛 한복에 더러운 스니커즈를 신고, 붉은 포승줄에 묶인 그는 아버지 배무룡을 죽이고 남동생의 사지를 찢었다는 죄를 주장한다.

'흥의 민족' 아니랄까 봐 재판은 꽤 흥겹게 진행된다. 강림, 월직, 일직 삼차사는 랩과 칼군무로 배홍련의 일생과 죄를 고한다. 능청스러운 연기와 재치 있는 대사를 더해 말맛을 살리며 극 초반 관객들의 집중력을 끌어올린다.

홍련은 분노의 감정과 자기합리화 과정을 록 음악에 담아 마음껏 표출한다. 세상에 침을 뱉고, 한을 풀듯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아이가 사랑을 구걸할 때 신들은 무엇을 했는가. 죄 있는 자를 벌하는 것은 복수인가 단죄인가. 날카로운 질문과 슬픔과 한이 묻은 눈빛이 관객의 마음에 칼처럼 꽂힌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에는 허점이 가득하다. 천도정의 주인이자 재판관인 바리는 섣불리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 인내심 있게 홍련에게 질문하고 그가 진실을 마주하도록 인도한다.

그럴수록 홍련은 더 높은 벽을 세워 자신을 방어한다. 그는 자신을 버린 아비를 위해 지옥을 건넌, '효심의 아이콘'으로 기억된 바리를 비웃으며, 자신의 이야기에 통쾌함을 느끼지 않는지 묻는다.



이런 안하무인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홍련이 가해자의 위치를 자처했을 때뿐이다. 가해자임을 주장하는 홍련은 자신을 학대한 아비를 죽인 것이 타당한 일이라는 그릇된 윤리관을 가진 아이로 그려진다. 뻔뻔하고 분노 앞에서 거침없이 단죄의 칼을 뽑는 위험한 모습이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잊혔던, 홍련의 쌍둥이 장화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홍련의 가면에도 금이 간다. 홍련은 자신의 언니 장화가 계모에게 학대받을 때 외면했던 방관자임을 자백한다. "언니를 보면 안심할 수 있었어. 난 아직 불행하지 않다고" 장화에 대한 죄책감, 무력함은 직접적인 폭력보다도 홍련을 더 깊은 자기혐오에 빠트리는 원인이다. 이로써 작품은 형제의 고통을 방관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처하게 되는 상황 역시 가정폭력의 한 형태임을 상기시킨다.

작품은 홍련을 가해자와 방관자라는 위치에 세우면서 학대의 피해자가 겪는 슬픔, 분노, 죄책감 등 감정의 소용돌이를 무대 위에 고스란히 올려 보여준다. 홍련을 어느 위치에 둬도, 결국 그가 피해자라는 사실이 지워지지 않도록 만드는 섬세한 구조다. 사랑을 구걸하고 이유를 찾으며 자기혐오에 빠진 피해자들을 향한 위로의 시선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극의 구조 뿐만 아니라 인물들 역시 저마다의 방식으로 홍련에 대한 연민을 보낸다. 강림은 바리에게 홍련이 악귀가 되지 않도록, 소멸의 길로 인도해 달라고 청한다. 그 역시 13만 9998번 반복된 이 재판에서 홍련의 이야기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들어온 인물이다.

또 다른 학대의 피해자인 바리는 끝까지 홍련을 포기하지 않는다. 같은 아픔을 겪어온 사람으로서 결코 홍련을 자기혐오의 늪에 남겨둘 수 없다는 집념은 결국 홍련을 구해낸다. 소멸의 길로 향하는 홍련을 향하여 애처롭게 넋을 부르는 바리의 '씻김'은 '홍련'의 하이라이트다.



환상을 깨고 나온 홍련은 그제야 영겁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 바리와 삼 차사를 돌아본다. 자신이 비웃었던 이야기 속 바리의 얼굴을 보고 그를 위로한다. 파편화된 기억을 넘어 연대 속에 몸을 맡기며, 홍련을 가뒀던 포승줄도 풀린다.

"사랑만이 이 세상의 진리"라는 대사는 "자신을 보듬으며 귀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새로운 맥락으로 해석된다. 사랑받기 위해 허락되지 않는 행동을 삼간 소녀에게 없는 죄를 자청하며 살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한다.

마침내 바리는 선언한다. "혼백 배홍련의 재판은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이다" 영겁의 세월을 거쳐 반복한 이야기는 천도정의 본 의미를 회복하며 막을 내린다.

하지만 공연장에만 머무른다면 현실 속 '홍련'들의 이야기는 영영 끝날 수 없을 테다. 공연장이 또 다른 담장이 되지 않기를, 이들의 목소리가 관객들의 마음을 타고 공연장 밖까지 널리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한편, 뮤지컬 '홍련'은 2월 28일부터 오는 5월 17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공연된다. '홍련' 역에 이지혜, 강혜인, 김이후, 홍나현, '바리' 역에 이아름솔, 김경민, 이지연, '강림' 역에 이정수, 신창주, 이종영, '월직' 역에 김대현, 백종민, '일직' 역에 신윤철, 정백선이 출연한다.

[셀럽미디어 임예빈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마틴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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