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뮤지컬 '라져', 우리가 기다려온 가장 따뜻한 교신[리뷰]
- 입력 2026. 03.25. 17:44:52
-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라져" 모든 신호를 이해했다는 짧은 응답처럼, 뮤지컬 '라져'는 타인의 목소리를 듣고 받아들이는 순간에서 출발한다.
'라져'
'라져'는 목소리만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책임을 나누는 '관제'의 세계를 무대 위에 옮긴 창작 뮤지컬이다. 작품명 'Roger(라져)'는 모든 관제 통신의 마지막에 사용되는 확인의 응답으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가 된다.
공항에서 근무하는 관제사 스카일러는 21년 전 항공기 추락 사고의 조종사였던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끊임없이 사건을 파헤친다. 그러던 중 뉴욕 JFK 공항에서 밀려나 시골 델레이의 공항으로 좌천되고, 그곳에서 우연히 주파수를 통해 작은 항구 마을 바하마 오가르에 살고 있는 디디를 만난다. 관제 자격도 없이 배를 관제하고 있던 디디를 발견한 스카일러는 그를 꾸짖으며 인연을 맺는다.
이후 스카일러는 디디가 머무는 곳이 아버지의 사고 당시 관제사의 행방과 관련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관제 수업과 사고의 단서를 찾는 것을 조건으로 매일 밤 교신을 이어간다. 얼굴도 모르는 채 바다 건너 먼 거리에 떨어져 있지만, 두 사람은 주파수를 타고 흐르는 목소리를 통해 점차 서로에게 가까워진다.
'라져'는 감각적인 무대 연출을 통해 작품의 설정을 확장시킨다. 특히 공연 시작 전부터 안내 방송으로 관객을 극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기내 방송의 형식을 차용해 극 중 등장하는 큰 소리와 강한 빛을 사전에 예고하며 주의를 환기시킨다. 작품이 항공 사고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러한 배려는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무대는 단순한 재현을 넘어 관객이 실제 상황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현장감도 만들어낸다. 객석까지 길게 확장된 조명은 때로는 활주로처럼, 때로는 긴급 상황을 시각적으로 체감하게 만들어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흐린다. 스크린 영상 활용도 두드러진다. 특히 극 후반부 긴박한 장면에서 무대 뒤편을 채우는 영상은 장면의 분위기와 정보를 동시에 전달하며 몰입도를 높인다.
의상 역시 인물의 성격을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스카일러의 깔끔하고 정돈된 수트 착장은 그의 통제되면서도 폐쇄된 성격을 표현한다. 반면 디디의 마린룩과 화려한 하와이안 셔츠는 자유롭고 쾌활한 기질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한다.
이처럼 인물의 색채가 무대 위에서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데에는 배우들의 캐스팅이 큰 역할을 한다. 스카일러 역의 주민진, 기세중, 고상호는 이전에 보여줬던 유쾌한 캐릭터와 달리 이번 작품에서는 절제된 감정과 냉정한 태도를 통해 전혀 다른 결의 연기를 보여준다. 배우들의 밝은 이미지와 대비되는 차가운 인상이 오히려 스카일러라는 인물이 처한 상황과 내면의 서사를 더욱 또렷하게 그려낸다.
디디 역의 이한솔, 정휘, 박주혁 역시 소년 같은 맑은 이미지 속에 단단한 중심을 지닌 인물로서의 결을 공유한다. 이들은 캐릭터가 지닌 밝은 성격과 책임감의 양면성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이날 무대에 오른 기세중, 이한솔 배우는 능청스럽고 유연한 디디와 그에게 점차 물들어가는 스카일러의 변화를 세밀하게 그려내며 초반부의 유쾌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반면 후반부 서로에게 진심을 전하는 장면에서는 깊이 있는 열연으로 묵직한 감동을 선사했다. 장면의 전개에 맞춰 분위기를 적재적소에 전환하는 두 배우의 호흡이 돋보였다.
'라져' 속에서 그려지는 '과거에 묶인 인물'과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이 만나 서로를 변화시키는 서사 구조는 어찌 보면 익숙하다. 하지만 이를 오롯이 목소리만으로 설득해낸다는 점이 '라져'만의 독보적인 매력이다.
스카일러와 디디는 비슷한 상처를 공유하지만, 이를 대하는 태도는 상반된다. 스카일러가 과거를 바로잡기 위해 현재를 외면한다면, 디디는 현재의 삶으로 과거를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가는 인물이다. 이 극명한 대비는 교신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녹아든다. 후반부의 결정적인 사건을 마주하며 두 사람의 선택은 결국 하나로 모이고, 디디는 스카일러를 과거로부터 꺼내주며 스카일러는 디디가 꿈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도록 돕는다.
결국 '라져'는 거창한 메시지보다 인물의 선택과 그 선택이 만드는 변화에 집중하는 작품이다. 과거에 머물러 있던 인물과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이 서로를 통해 나아가고, 그 과정에서 쌓여가는 감정은 관객에게 자연스러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작품명인 '라져'가 의미하듯, 이 작품은 서로의 신호를 듣고 받아들이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타인의 목소리를 이해하고 응답하는 과정 속에서 두 인물은 비로소 자신의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그 여정은 무대를 넘어 각자의 자리에서 머물러 있던 관객에게도 끊임없이 따뜻한 신호를 던지고 있다.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창작하는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