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안의 역사, 그 찬란하고 불편한 기록 '히스토리 보이즈' [리뷰]
입력 2026. 04.03. 17:16:18

'히스토리 보이즈'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본 리뷰는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험과 성적,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발판. 우리에게 학교라는 공간은 익숙하다. 하지만 '히스토리 보이즈'는 그 익숙함을 빌려 훨씬 깊고 낯선 질문을 던진다. 교육의 방식, 역사의 해석, 그리고 지식의 의미까지, 삶과 태도에 대한 고민이 끊임없이 충돌한다.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는 1980년대 영국 북부의 한 공립학교를 배경으로, 명문대 진학을 목표로 모인 여덟 명의 소년들과 그들을 둘러싼 교사들의 갈등과 성장을 그린다. 영국 극작가 앨런 베넷의 대표작으로, 2004년 영국 로열 내셔널 씨어터에서 초연됐다. 이후 영국 로렌스 올리비에 어워즈 3관왕, 미국 토니 어워즈 6관왕을 차지하는 등 세계 연극계에서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

헥터는 지식 그 자체의 즐거움과 자유로운 사고를 강조하는 교사다. 반면 교장이 입시를 앞두고 영입한 신임 교사 어윈은 성과와 전략을 중시한다. 두 교사의 상반된 교육 방식 속에서 소년들은 경쟁과 우정, 동경과 질투, 정체성의 혼란을 마주한다.



'히스토리 보이즈'는 탄탄한 텍스트를 자랑한다. 대사를 바탕으로 인물들의 성향, 가치관, 그리고 이들 사이에 형성되는 관계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매력이 있다. 특히 두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에서는 다양한 문학 작품과 역사적 사건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흥미를 더한다.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헥터와 어윈의 교육관 충돌을 그리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질문들이 담겨 있다. 의도적으로 선악의 경계를 흐릿하게 유지하며, 어느 인물의 말도 쉽게 판단하거나 외면할 수 없도록 설계했다.

◆ 낭만과 전략 사이, 두 스승이 이들에게 남긴 것들

헥터에게 지식은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재료다. 시공간을 초월한 감정의 교감을 중시하며, 포스너가 '북 치는 소년 핫지'를 통해 위로를 얻었듯 인생을 버텨낼 내면의 힘을 키우는 데 집중한다. 반면 어윈에게 지식은 이기기 위한 도구다. 역사 역시 그에겐 고정된 사실이 아니라 해석에 달린 유연한 텍스트로 기능한다.

두 사람의 대립이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처음에는 헥터의 낭만을 즐겼던 학생들이 어느새 어윈의 방식에 더 깊이 매료돼 있다는 점이다. 무엇이 더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 대비 속에서 관객들도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기준을 돌아보게 된다.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논쟁에서 두 가치관의 충돌이 가장 극대화된다. 분명하게 윤리적으로 규정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점차 이를 논쟁 가능한 주제로 여기기 시작한다. 비극적인 역사를 에세이 재료로 전락시키는 어윈의 수업 방식은 효율이 윤리를 압도할 때 발생하는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장면은 지적 유희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관객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작품이 헥터를 마냥 아름답게 그리지도 않는다. 그는 학생들에게 깊은 영향을 남긴 스승이지만, 부적절한 신체 접촉은 명백한 결함이다. 작품은 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그를 죽음으로 퇴장시켜 도덕적 심판을 유예한다. 이 불편한 미화는 훌륭한 가르침과 윤리적 결함이 한 인물 안에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또 한번 직시하게 만든다.

두 사람 사이에 유일한 여성 교사인 린톳의 존재도 작지 않다. 린톳은 남성 중심의 역사가 품은 기만과 소외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며 극의 균형을 잡는다. 그는 수업으로 헥터의 낭만도, 어윈의 전략도 아닌 묵묵한 기초를 쌓아왔다. 그러나 학생들은 그 공로를 당연하게 여기고, 린톳은 끝내 역사 속에서 지워져 온 여성들의 자리를 조용히 대변하는 인물로 남는다.



◆ 포스너·스크립스·데이킨: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되는 소년들

수많은 학생들 중 가장 눈길을 끄는 인물은 단연 포스너다. 모두가 화려한 화술과 기발한 관점으로 자신을 포장할 때, 포스너는 내면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장 연약하고 흔들리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끝까지 자신의 감정과 마주하려는 태도는 누구보다 단단하다. 심지어 정체성의 혼란과 가닿지 못하는 사랑 앞에서도 그는 헥터의 가르침을 가장 충실하게 실천한다. 단순히 한 살 어린 미숙함으로 보기엔, 포스너는 작품이 말하는 배움의 본질에 누구보다 진실하게 흔들리며 가장 가까이 다가간다.

데이킨은 가장 화려해 보이지만 의외로 무난하고 평면적인 인물이다. 어윈의 방식을 가장 완벽하게 구사하지만, 그 논리 뒤에 포스너와 같은 진심은 없다. 오히려 그 공허함이 이 극이 던지는 질문을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장치로 기능한다.

반면 스크립스는 이 혼란스러운 교실의 관찰자이자 서술자로 존재한다. 스크립터(scripter)와 비슷한 이름처럼 그는 다른 인물들보다도 제 3의 벽을 넘어 관객에게 서술하는 대사가 많다. 그는 펜으로 기록해둔 사건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무대 위의 사건을 하나의 '역사'로서 객관화할 수 있게 돕는 징검다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의 백미는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이다. 8명의 학생과 4명의 교사의 열연은 관객으로 하여금 실제로 교실 한복판에 앉아 있는 듯한 생동감을 선사한다.

이날 공연의 몰입도를 책임진 것은 헥터, 어윈, 포스너 역을 맡은 세 배우의 열연이었다. 헥터 역의 오대석은 다정하고 너그러운 스승의 면모를 자연스럽게 그려내며 그 교육관이 가진 매력을 관객들에게 충분히 전달했다. 어윈 역의 박정복은 날카롭고 이성적인 태도 속에서도 어딘가 스스로를 포장하고 있는 듯한 미묘한 결을 놓치지 않으며, 내면에 자리한 불안과 열등감을 은밀하게 드러냈다.

특히 가장 빛났던 것은 포스너 역의 김기택이었다.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는 감정의 파동을 190분 동안 차곡차곡 쌓아 올리며, 인물의 외로움과 애틋함을 깊이 있게 전달했다. 또한 소년이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과 외로움을 세밀하게 표현해 관객들로 하여금 포스너라는 캐릭터에 동조하게 만들었다. '히스토리 보이즈'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북치는 소년 핫지' 씬과 '홀로코스트 논쟁' 씬에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다만 많은 배우가 출연하는 만큼 일부 아쉬움도 남았다. 스크립스 역의 진태화는 피아노 연주 장면에서의 잦은 미스터치가 몰입을 다소 방해했고, 몇몇 배우들은 각자의 캐릭터를 구현하는 데에만 집중한 나머지 다른 학생들과 호흡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너지가 부족했다.

'히스토리 보이즈'는 마지막까지도 친절한 해답을 내놓지 않는다. 헥터의 말처럼 지식은 언젠가 닥칠 슬픔을 견디게 할 비상식량이 될지도 모르고, 어윈의 말처럼 세상을 향해 휘두를 가장 세련된 무기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극의 마지막, 뿔뿔이 흩어진 소년들의 미래를 지켜보면서 우리가 공유했던 그 찬란한 시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역사였음을 깨닫게 된다.

작품은 극장 문을 나서는 관객의 손에 낡은 시집 한 권과 논리 정연한 에세이 한 편을 쥐여주며 묻는다. 이제 당신은 그 시집과 에세이를 누구에게 전해줄 것인가.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MARK923, 더블케이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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