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뮤지컬 '렘피카', 20세기를 뚫고 나온 낯선 빛을 그리다[리뷰]
- 입력 2026. 04.16. 17:53:07
- [셀럽미디어 임예빈 기자] '아르데코의 여왕' 렘피카가 뮤지컬을 통해 새 생명을 얻었다. 시대를 살아낸 여성만이 줄 수 있는 낯설지만 눈부신 이야기가 150분간 무대에서 휘몰아친다.
렘피카
뮤지컬 '렘피카'는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과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격변 속을 살아온 여성 예술가 타마라 드 렘피카의 삶을 바탕으로 한다. 러시아 상류층에서 파리의 거리 예술가로, 또 시대를 앞서나가는 화가로서의 영광을 그리는 것은 물론,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한 비극을 함께 담았다.
'렘피카'는 2024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돼 제77회 토니어워즈에서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작품이다. '하데스타운'으로 여성 최초 토니어워즈 연출상을 받은 레이철 채브킨이 연출을 맡았고, 칼슨 크라이저의 극본, 매트 굴드의 음악이 만나 탄생했다.
2026년 한국 초연에는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배우들이 이름을 올렸다. '타마라 드 렘피카' 역에 김선영, 박혜나, 정선아, '라파엘라' 역에 차지연, 린아, 손승연, 이외에도 김호영, 조형균, 김우형, 김민철, 최정원, 김혜미 등 실력파 배우들이 참여했다.
"내가 누군지 알아요?" 극은 패션쇼를 방불케 하는 웅장한 오버추어(Overture) 이후, 자화상에서 튀어나온 듯 챙이 큰 모자와 초록색 의상을 입은 노년의 렘피카가 등장해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렘피카는 이내 관객들을 폭풍과도 같았던 자신의 삶 속으로 끌어들인다. 러시아 혁명을 피해 파리로 피신한 렘피카는 남편 대신 생계를 꾸리기 위해 일을 찾는다. 그러던 중 거리의 화가가 그림을 파는 모습을 보고 붓을 잡기 시작한다. 남작의 눈에 들어 '미래파' 마리네티를 만나게 되고,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확립하게 된다.
렘피카의 작품이 명성을 얻고 생계가 안정될 때쯤, 그는 우연히 아름다운 여인 라파엘라를 만난다. 라파엘라의 초상화를 그리는 작업을 하며 두 사람은 점차 가까워지고, 사랑에 빠진다.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하게 된 렘피카는 남편과 라파엘라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고, 그 무렵 평화롭던 파리에도 파시즘의 그림자가 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렘피카는 다시 한번 살아남기 위한 선택을 내린다.
이후 작품은 1970년대로 훌쩍 시간을 건너뛰어, 노년 렘피카의 시간으로 돌아온다. 무대에는 렘피카의 작품이 적극적으로 등장해 관객으로 하여금 렘피카의 작품으로 들어갔다 나온 듯한 감각을 선사한다.
'렘피카'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낯섦'이다. 주인공의 서사 방식, 무대 디자인, 음악 구조 어디에도 익숙한 문법이 없다.
렘피카는 관객이 주인공에게 기대하는 바를 배반한다. 벅차오르는 감동을 선사하는 영웅과 구원 서사에서 벗어난 주인공 렘피카는 세상을 구하겠다는 큰 야망 따위를 품지 않는다. 자신의 예술을 지키겠다며 혼을 불태우지 않는다. 이데올로기 지배하는 전쟁과 차별 속에서 저항적인 인물로 그려지지 않는다.
렘피카가 바꾼 건 오직 네모난 캔버스뿐이다. 그는 단지 자신이 사랑한 여성들을 끊임없이 그렸을 뿐이다. 두 번의 망명, 두 번의 사랑, 예술가로서의 성공과 몰락 속에서 그는 때로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인 선택도 마다하지 않았다. 언제나 살아남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붓만은 내려놓지 않았고, 그 조용한 고집은 결국 세상과 맞선 기록으로 남았다. 무대 위에서 부활한 렘피카가 '예술가'이기보다 '생존자'에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다.
사랑에서도 그렇다. 우리는 소설, 연극, 뮤지컬 등 작품 속에서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한 남성 캐릭터는 종종 봐왔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 캐릭터는 흔치 않다. 특히 여성과 남성을 모두 사랑한 여성 캐릭터라면 더더욱. 무대 위에 나타난 새로운 얼굴의 여성은 유의미한 자취를 남기기에, '렘피카'의 등장 역시 반갑다.
토니어워즈 무대상에 노미네이트된 작품답게 에펠탑의 철망을 떠올리게 하는 무대는 미래주의, 파시즘이 싹트기 시작한 시대를 매끈하게 그려냈다. 그 속에서 마리네티는 기계의 완벽함을 노래하며 시대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마리네티는 렘피카의 화풍에 영향을 주지만, 렘피카가 품은 인간에 대한 애정은 무너트리지 못 한다. 렘피카는 마리네티에게 배운 언어로 그에게 반박한다. 기계가 가진 매끈함, 금속광을 도구 삼아 인간의 욕망과 관능을 드러내는 그림을 그렸다. 그가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성 속에 숨겨둔 인간성과 생존 본능은 '피날레'에서 더 강렬하게 터져 나온다.
뮤지컬 '렘피카'에는 러시아 혁명과 세계대전, 파시즘과 나치즘, 예술, 페미니즘, 동성애 등 담고 있는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 배경지식이 충분하지 않은 한국 관객들에게는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이유다. 그러나 이는 렘피카라는 인물이 서 있는 자리가 그 모든 문제의식이 교차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주제의 밀도는 곧 렘피카라는 인물이 가진 삶의 무게다.
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만,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다. '타마라 드 렘피카' 역을 맡은 김선영은 빠르게 흘러가는 극의 흐름 속에서도 렘피카가 느끼는 감정의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특히 살아남은 노년의 렘피카가 느끼는 회한의 감정은 '내게 예술은 살아남는 것'이라는 '언씬(Unseen)'의 가사를 단번에 이해하게 만든다.
'라파엘라' 역의 손승연은 그루비하고 관능적인 R&B 장르의 넘버를 특유의 리듬감으로 소화한다. 렘피카와 라파엘라 사이에 오가는 아찔한 긴장감을 살리며, 극에 긴장감을 불어 넣는다.
'마리네티' 역의 조형균은 위험하지만 아름다운 얼굴로 무대에 오른다.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로서, 그는 미래주의의 도래, 파시즘의 침범으로 인한 긴장을 엔진을 닮은 역동성으로 풀어낸다. 관객들은 조형균의 힘 있는 에너지에 압도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듣고 싶은 갈망, 그 아이러니한 흡인력도 '렘피카'가 지닌 또 다른 매력이다.
뮤지컬 '렘피카'는 지난 3월 21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아티움 우리은행홀에서 개막해 오는 6월 21일까지 공연된다.
[셀럽미디어 임예빈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놀유니버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