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려를 잃은 시대, '오펀스'가 건네는 한마디 [리뷰]
- 입력 2026. 04.21. 15:41:41
-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우리는 위로나 칭찬에는 익숙하지만 '격려'에는 여전히 서툴다. 하지만 슬픔을 나누는 위로보다 더 귀한 것은 어쩌면 상대의 가능성을 기어이 믿어주는 격려일지도 모른다고, 연극 '오펀스'는 말한다.
'오펀스'
연극 '오펀스'는 필라델피아 북부를 배경으로 중년의 갱스터 해롤드와 고아 형제 트릿, 필립이 예상치 못한 동거를 통해 가족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폭력과 결핍 속에서 살아온 인물들이 관계를 통해 변화해가는 과정을 밀도 있게 담아낸다.
미국 극작가 라일 케슬러의 대표작 '오펀스'는 1983년 로스앤젤레스 초연 이후 꾸준한 재공연을 이어오며 작품성을 인정받아왔다. 1986년 런던 공연에서는 해롤드 역의 알버트 피니가 올리비에 어워드 최우수 남우상을 수상했고, 2013년 브로드웨이 무대에서는 토니상 최우수 재연 공연상과 연극 부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호평 받았다.
국내에서도 2017년 초연 당시 입소문으로 연일 매진을 기록했으며, 2019년과 2022년 재연 역시 티켓 오픈과 동시에 전석 매진을 달성했다. 특히 작품 MD로 선보인 에코백은 ‘연뮤덕 공식 에코백’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두터운 팬층을 입증했다.
고아 형제 트릿, 필립은 필라델피아 북부의 낡은 집에서 단둘이 살아간다. 트릿은 좀도둑질로 생계를 이어가며 필립을 집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한 채 자신의 보호 아래 두려 한다.
어느 날 트릿은 시카고 출신 갱스터 해롤드를 집으로 납치해오고, 그를 인질로 삼아 돈을 뜯어내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해롤드는 두 형제를 보며 자신의 고아 시절을 떠올리고, 이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보이기 시작한다. 세 사람의 기묘한 동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며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까.
'오펀스'는 세 사람이 등장하는 만큼 텍스트의 밀도가 높은 작품이다. 빽빽한 텍스트로 자칫하면 지루해질 수 있는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연출은 이를 리드미컬하게 풀어낸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음악은 극의 호흡을 환기시키며, 장면마다 다른 정서로 몰입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그중에서도 객석까지 길게 펼쳐지는 조명 연출이 인상 깊다. 이는 단순한 시각적 장치를 넘어 관객까지 그 밤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인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흐리고 관객으로 하여금 필립과 같은 감각을 공유하게 만든다.
'격려 데이'라는 '오펀스'만의 이벤트가 있을 정도로 작품은 '격려'를 강조한다. 이 작품은 누구에게나 격려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하며, 그 결핍이 사람을 어떻게 가두는지를 보여준다. 필립과 트릿은 모두 격려가 필요했던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것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어 결국 각자의 방식으로 고립된다. 트릿은 동생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선택했고, 필립은 형 트릿의 압박으로 세상과 단절되면서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모른 채 살아간다.
이러한 두 사람에게 등장하는 해롤드는 단순한 납치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들에게 보호자인 동시에, 너무나도 필요했던 '어른'의 역할을 수행한다. 해롤드는 트릿의 폭력성을 나무라지 않고 그 이면의 두려움을 읽어내고, 필립이 가진 호기심과 가능성을 끌어올려준다. 그는 단순히 이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구할 수 있도록 어깨를 토닥이는 법을 가르친다.
또한 한국의 '오펀스'는 젠더프리 캐스팅을 통해 남성 중심 서사가 가질 수 있는 전형성을 탈피한다. 여성 배우들이 형제와 갱스터라는 거친 설정을 그대로 입으면서 감정은 더욱 깊고 섬세하게 나타난다. 특히 형제에게 엄마의 부재가 크게 작용하는 만큼, 여성 배우가 연기하는 해롤드는 그 빈자리를 입체적으로 채워주며 필립과 트릿의 관계를 한결 따뜻한 결로 확장시킨다. 원작의 설정을 고수하면서 성별의 변주만으로 텍스트를 새롭게 해석한 연출적 선택은 매우 신선하게 다가온다.
남성 배우 페어는 전형적인 서사 구조 속에서 인물의 밀도를 끌어올린다. 박지일은 노련한 갱스터로서의 해롤드를 안정감 있게 그려내고, 트릿의 폭력성과 내면의 불안을 동시에 드러낸 최석진의 밀도 높은 연기도 눈길을 끈다. 특히 김시유의 필립은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경계를 섬세하게 유지하며 극의 중심을 단단히 잡는다.
반면 여성 배우 페어는 인물 간의 정서를 보다 섬세하게 끌어낸다. 양소민의 해롤드는 배우 본연의 따뜻함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격려'가 관객에게 더욱 깊게 전달된다. 정인지의 트릿은 폭력의 이면에 있는 어긋난 애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김단이는 첫 연극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생동감 있는 필립을 완성하며, 사랑스러운 매력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그를 응원하게 만든다.
이번 시즌 '오펀스'에서는 트릿 역으로 정인지, 문근영, 최석진, 오승훈, 필립 역으로 김시유, 김주연, 최정우, 김단이, 해롤드 역으로 박지일, 우현주, 이석준, 양소민이 활약하고 있다. 각 배우들은 다양한 페어 조합으로 무대에 오르며, 같은 장면과 서사 속에서도 전혀 다른 결의 감정을 만들어내고 있다.
'오펀스' 속 인물이 처한 상황은 극단적이지만, 그들이 느끼는 불안과 외로움은 객석에 앉은 우리의 것과 닮아 있다. 어쩌면 우리가 이 극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우리 역시 누군가의 한마디 '격려'가 간절한 현대의 고아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해롤드가 끝내 두 형제에게 쏟아부었던 온기는 단순히 무대 위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펀스'가 우리에게 남긴 숙제는 명확하다. 객석을 떠나 각자의 불안한 현실로 돌아가는 관객들이 이제는 스스로가 누군가의 '해롤드'가 되어줄 차례라는 것. 그 격려의 목소리가 이어지는 한, 우리는 더 이상 외로운 고아가 아니다.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레드앤블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