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친절한 헤르만 헤세, 다정한 연극 ‘헤르츠클란’[리뷰]
- 입력 2026. 05.06. 15:35:13
-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쉽게 꺼내지 못하는 목소리를 품고 살아간다. 연극 '헤르츠클란'은 이처럼 묻어두었던 마음의 파동을 무대 위로 조심스레 꺼내어 놓는다.
'헤르츠클란'
연극 '헤르츠클란'은 헤르만 헤세의 성장소설 '데미안'을 각색한 작품이다. 헤르츠(Herz/마음), 클란(Klang/소리)을 의미하는 제목처럼, 타인과 부딪히며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찾아가는 싱클레어의 여정을 그린다.
작품은 엄격한 규율 아래 운영되는 신학교 헤일리히를 배경으로, 싱클레어는 괴롭힘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이를 그 어디에도 말하지 못하고 홀로 고통스러워하던 중,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 헤르츠클란이라는 편지함에 넣는다.
수습교사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글을 읽고, 특별활동반 캄프 수업으로 그를 부른다. 모두에게 적대적이었던 싱클레어는 데미안, 그리고 친구 크나우어와 함께 하는 수업을 통해 점점 내면을 열고, 세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점차 성장하게 된다.
'헤르츠클란'은 무대 위 장식들을 과감히 걷어내고 텍스트 본연의 힘에 집중하게 만든다. 화려한 세트는 없지만, 테이블과 의자의 배치, 그리고 배우들의 대사, 동선만으로 공간을 설정한다. 이러한 간결한 연출은 자연스럽게 인물과 텍스트에 대한 집중을 이끌어내고, 관객은 시각적인 변화가 아닌 인물의 서사, 관계의 변화 등을 따라가게 된다.
소설 '데미안'을 모티브로 삼은 만큼 대사들은 지극히 추상적이며 때로는 관념적이다. 이에 단 한 번의 관람으로 극을 완벽히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오히려 그 순간 와닿는 감상에 몰입할 때 진정한 매력을 드러낸다. 관객마다 각기 다른 공감의 지점을 찾아간다는 사실은 작품의 불친절하고도 다정한 텍스트가 가진 정서적 확장성을 증명한다.
기존의 도덕과 규범, 즉 알을 깨고 나와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과정을 그리는 것은 '데미안'과 동일하다. 하지만 '헤르츠클란'은 이를 명확한 성장 서사로 그리지 않고 여전히 흔들리고 불완전한 상태로 남겨둔다. 결과적으로 작품은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그 메시지에 도달하는 과정을 관객과 함께 견디는 데 집중한다.
텍스트의 무게감이 절대적인 만큼 이를 전달하는 배우들의 역량이 핵심으로 작용한다. 특히 이번 시즌에서는 배역의 역사를 관통하는 캐스팅의 묘미가 돋보인다.
지난 시즌 싱클레어를 연기했던 최호승은 데미안으로, 크나우어였던 김기택은 싱클레어로 자리를 옮겨 무대에 올랐다. 상대 캐릭터를 직접 연기해 본 경험은 곧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로 이어진다. 최호승의 데미안은 마치 싱클레어가 긴 세월을 버텨 좋은 스승이 된 것처럼 그려지고, 김기택의 싱클레어는 자신이 겪었던 크나우어의 아픔을 투영하듯 그를 더욱 세심하게 보듬고 위하는 모습이 돋보인다. 두 배우 모두 관계성의 변화를 세밀하게 그려내며 극의 정서적 밀도를 높인다.
이번 시즌에 또 다시 크나우어를 맡은 김서환 역시 한층 깊어진 감정선으로 인물의 불안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복합적인 감정으로 마냥 쉽지 않은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연기로 공감을 이끌어낸다. 또한 이번 시즌 새롭게 합류한 홍순기는 알폰스 벡, 교장, 크로머까지 1인 3역을 맡아 세 인물에게 끊임없이 자극을 주는 촉매제 역할을 수행한다. 가장 신예임에도 불구하고 밀리지 않는 에너지로 각 캐릭터의 개성을 뚜렷하게 살려내 극에 팽팽한 긴장감을 더한다.
결론적으로 '헤르츠클란'은 누구에게나 쉽사리 추천할 수 있는 대중적인 작품은 아닐지도 모른다. 추상적인 대사에서 길을 잃고, 자칫 지루함이라는 함정에 빠질 위험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 어려운 문장들 사이에서 단 한 줄이라도 나의 마음을 울리는 요소를 발견했을 때, 그 가치가 무엇보다 크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이 연극은 소설 '데미안'을 아끼는 이들에게는 텍스트의 감각적인 변주를, 원작을 어렵게 느꼈던 이들에게는 관계의 밀도로 살아 움직이는 인물들을 마주하는 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해하려 애쓰지 않고, 그저 감각을 열어두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헤르츠클란'은 그렇게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묵직한 위로가 된다.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엠비제트컴퍼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