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뮤지컬 '서편제', 전통과 변화의 갈림길에서[리뷰]
- 입력 2026. 06.11. 20:32:31
- [셀럽미디어 임예빈 기자] 16년간 여섯번의 시즌으로 관객을 만났다. 뮤지컬 '서편제'는 한국 관객들과 시대를 함께 걸어온 공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시간동안 관객들의 의식은 훌쩍 성장했고, '서편제'도 새로운 변화의 물결 앞에 섰다.
서편제
2022년 판권 문제로 '마지막 시즌'을 공언한 뮤지컬 '서편제'가 다시 무대에 올랐다. 저작권 재계약 이슈를 해결하고 4년 만에 관객들 곁으로 돌아오게 됐다.
'서편제'는 이청준의 연작소설집 '남도사람'에 수록된 동명 작품을 원작으로 한다. 의붓남매 송화와 동호를 데리고 소리를 가르치며 팔도를 유랑하는 유봉, 어머니의 죽음이 유봉의 소리 때문이라고 믿는 동호, 그리고 묵묵히 이들의 곁을 지키는 송화의 이야기를 그린다.
늘 유봉의 소리에 묶여 있다는 감각에 괴로워하던 동호는 결국 자신의 소리를 찾기 위해 '스프링 보이즈' 오디션을 보고 이들의 곁을 떠난다. 동호가 떠난 뒤 송화는 그리움과 두려움에 소리를 포기하려 하지만, 송화를 통해 한을 풀고자 하는 유봉은 그의 눈을 멀게 만든다. 두 눈을 잃은 송화는 그 고통과 역경을 견디며 끝내 서편제 소리의 경지에 이른다.
'서편제'는 판소리부터 팝, 록, 발라드까지 다양한 장르가 어우러진 것이 특징이다. 전통 한지를 한 겹 한 겹 덧붙여 표현한 순백의 배경 속 그려지는 400여 장의 한국화는 송화와 동호 남매의 이야기에 고즈넉한 분위기를 더한다. 극은 송화를 찾았다는 말을 듣는 동호의 모습으로 시작해 과거를 회상하는 액자식 구성으로 진행된다. 동호는 이러한 구성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 극중 과거와 현재를 수도없이 오고가며 극의 중심을 잡는다.
이번 2026 시즌에는 초연부터 함께해온 이자람, 차지연과 새로운 얼굴 이봄소리, STAYC 시은이 송화로 합류했다. 노년 송화 역할이 신설돼 정은혜가 참여했으며, 동호 역에는 김경수, 유현석, 김준수까지 폭넓은 연령대와 다양한 목소리를 가진 배우들이 캐스팅됐다.
16년간 '서편제'를 지킨 이자람은 이번 시즌을 끝으로 송화 역을 떠난다. 이자람의 송화에는 희노애락이 담겨있다. 한없이 장난스러운 누나였다가, 소리하기 싫다고 칭얼거리는 어린 딸이었다가, 동호와의 재회에서 기쁨과 그리움이 뒤섞인 감정을 '심청가' 한 대목에 녹여내는 연륜까지, 노련한 호흡으로 객석을 울고 웃긴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삶 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동호 역의 유현석도 만만치 않은 에너지를 뿜어낸다. 젊은 배우임에도 회한이 짙게 밴 노년 동호를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어머니를 잃은 한과 누이에 대한 애정, 의붓아비에 대한 증오와 혼란까지, 송화 못지않게 폭넓은 감정과 세월을 객석에 전한다. 특히 과거와 현재를 순간순간 넘나드는 동호의 구성적 특징을 빼어난 순발력으로 소화한 점이 인상 깊었다.
'서편제'가 가진 힘은 분명하다. '서편제'에서 반복되는 '묶여 있다'는 이미지는 삶에 매여 있는 우리의 감각을 깨운다. 작품은 '유봉의 소리'로 표현되는 억압과 폭력 속에서 각자 추구하는 소리를 찾아 다른 행동 양식을 취하는 남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서편제 소리를 찾는 예인으로서의 집착보다는 개인이 어떻게 삶의 비극을 다루는지에 집중한다.
두 사람은 50년 뒤에야 만나 소리로 이별의 한과 재회의 기쁨을 누린다. '심청가'에서 심 봉사가 심청이를 다시 만나 눈을 뜨는 대목을 창하는 장면은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다. 두 사람의 상황과 '심청가' 속 내용이 겹쳐지면서도 결국 송화는 눈을 다시 찾지 못한다는 점에서 객석에서는 기쁨과 한의 눈물이 동시에 터져나온다.
억울하고 서럽고 답답해도 결국은 용서하고 살아가며 그 모든 걸 자신의 삶으로 녹여내는 송화의 이야기는 '사이다'와 '참교육'을 갈망하는 요즘 정서와는 거리가 있다. 그렇기에 지금 시대에 더 곱씹어볼 만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묵직한 메시지를 가진 작품이지만, 2026년 현재 시점에서 이 작품이 관객에게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지워지지 않았다. 유봉이 송화의 눈을 멀게하는 장면을 어떻게 관객들이 받아들여야 할까. 이는 '서편제' 영화화 이후 꾸준히 지적되온 지점이지만, 시대의 흐름 속에서 더욱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위치에 처했다. '한을 삭여 소리를 완성한다'는 정서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그 한이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쌓인 것이어야 하는데, 작품의 전개를 위해 의도적으로 한을 주입한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후반부 송화의 서사가 축소되는 느낌도 작품의 설득력을 떨어트리는 부분이다. 2막에 들어서면 작품의 무게 중심은 송화가 어떻게 서편제 소리를 얻는가가 아닌, 송화를 찾아 나서는 동호 쪽으로 옮겨간다. 전통과 트렌드의 대립 구도 역시 작품의 한 축이라는 건 알지만, 정작 메인이 되어야 할 송화의 서사를 잠식해버리는 인상이다.
다양한 장르가 섞인 음악도 양날의 검이다. 판소리와 팝, 록, 발라드를 넘나드는 시도는 다양한 음악이 섞이던 시대적 배경을 드러내기 효과적이지만, 동시에 약간의 삐걱임에도 큰 이질감을 줄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이번 시즌 음향은 다소 매끄럽지 못한 인상을 주는 부분이 있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런 강점과 약점이 공존하는 모습은 '서편제'라는 작품이 처한 상황과도 묘하게 겹친다. 작품 안에서 소리가 대중음악에 밀려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것처럼 '서편제'라는 작품도 시대의 흐름과 변화 속에서 위태로운 입지에 있는 듯하다. 16년을 이어온 작품의 가치는 명확하지만, 관객의 발걸음을 끌기에는 무거운 느낌이다.
냉정한 현실에 대한 돌파구로 '서편제'는 캐스팅 세대교체라는 카드를 빼들었다. 젊은 배우 이봄소리와 시은을 새로운 송화로 캐스팅하고 젊은 피를 수혈함과 동시에 젊은 송화와 노년 송화를 한 무대에 세우는 페어 구성을 새롭게 도입했다. 송화 역을 맡는 배우는 소녀 시절부터 노년 시절까지 한 여성의 굴곡 많은 인생을 그려내는 난이도 높은 연기를 소화해야 한다. 진입장벽이 높은 역할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젊은 송화와 노년 송화의 분리는 더 많은 배우들이 송화 역할에 도전할 수 있는 문을 열어뒀다.
다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새로 합류한 두 배우 중 아이돌 출신인 시은에게만 해당된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시은을 향한 평가적인 시선이 있는 가운데, 그가 노년 송화를 소화하지 못한다는 인식에 기름을 부었다. 전략적으로 읽힐 수 있던 선택은 결국 한 배우의 '실력'에 대한 이야기로만 소비되는 모양새가 됐다. 차라리 두 배우 모두에게 적용해 '서편제'가 처한 상황을 정면으로 타개하기 위한 시도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남는다.
한편, 뮤지컬 '서편제'는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오는 7월 19일까지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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