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남, 이런 얼굴도 있었나…90분 홀로 무대 장악한 '플리백'[리뷰]
- 입력 2026. 07.13. 18:46:53
- [셀럽미디어 박수정 기자] 영국의 극작가이자 배우 피비 월러-브리지가 창작한 1인극 '플리백'이 한국 관객들과 만났다. 2013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시작해 웨스트엔드와 뉴욕 무대까지 진출하며 세계적인 호평을 받은 작품으로, 이번 공연은 세계 최초 라이선스 프로덕션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김규남
'플리백(Fleabag)'은 '문제투성이', '지저분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작품은 이름처럼 어딘가 망가지고 불완전한 한 여성의 삶을 통해 외로움과 상실, 관계의 균열, 그리고 자기혐오를 유머와 냉소 속에 녹여낸다.
무대에는 의자 하나와 배우 한 명뿐이다. 하지만 공연이 시작되는 순간 단출한 무대는 더 이상 비어 보이지 않는다. 배우는 관객을 향해 거침없는 발언과 욕설, 성적인 농담을 쏟아내며 단숨에 객석을 끌어당긴다. 노골적인 표현이 적지 않지만, 자극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인물의 불안과 결핍을 드러내는 언어로 기능한다.
이번 공연에서 김규남은 그간 보여주던 자연스러운 생활 연기와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유튜브 '띱' 채널로 대중에게 익숙한 배우인 만큼, 이번 무대에서는 친근한 이미지 너머의 낯설고도 강렬한 면모를 드러내며 완전히 새로운 배우처럼 다가온다.
1인극이 낯선 관객도 쉽게 몰입할 수 있도록 무대를 이끌어가는 힘이 인상적이다. 90분 동안 혼자 무대를 책임지면서도 에너지를 잃지 않고, 웃음과 침묵, 독설과 슬픔을 쉼 없이 오간다. 코미디에서 감정의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전환 역시 자연스럽다.
특히 친구의 죽음과 죄책감을 마주하는 장면에서는 애써 감정을 참던 인물이 결국 무너지는 과정이 섬세하게 표현된다. 눈물을 삼키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진심을 꺼내놓는 순간들은 웃음으로 시작한 공연을 어느새 깊은 상실의 이야기로 바꿔놓는다.
무대 연출도 인상적이다. 김규남 버전은 의자를 활용한 동선으로 인물의 심리를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공연 후반에는 배우의 얼굴이 대형 스크린에 비춰지며 이어지는 독백이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관객을 향해 직접 말을 거는 '제4의 벽'을 허무는 방식 역시 극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마치 플리백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된 듯한 기분을 만든다.
작품의 주인공을 보면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속 재희(김고은)가 떠오르기도 한다. 자신의 상처를 농담으로 감추고, 끊임없이 자신을 깎아내리면서도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인물의 모습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날것 같은 대사와 감정 표현은 불편할 만큼 솔직하지만, 그 솔직함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큰 힘이다.
이번 한국 초연은 김히어라, 김주연, 김규남 세 배우가 같은 역할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점도 관전 포인트다. 김히어라는 원작에 가까운 스탠드업 코미디 형식을, 김주연은 다양한 소품을 활용한 드라마를, 김규남은 의자를 중심으로 한 무대를 선보이며 각기 다른 플리백을 완성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여성 관객들에게 더욱 깊은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안겨줄 수 있다. 관계와 사랑, 상실, 죄책감, 자기혐오를 여성의 시선에서 솔직하고 거침없이 풀어내는 데다, 성적인 농담과 욕망, 자기표현마저 숨기지 않고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회적 시선 속에서 억눌러왔던 감정과 욕망을 대신 분출해주는 듯한 순간들이 이어지며, 관객은 불편함과 웃음 사이를 오가다 어느새 묘한 해방감과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물론 성별과 관계없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여성의 삶과 감정을 섬세하게 담아낸 만큼 특히 여성 관객들에게는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올 것이다.
다만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공연장 구조상 사이드 좌석에서는 일부 장면의 시야가 다소 제한될 수 있어 좌석 선택 시 참고하면 좋다. 또한 1인극 특유의 형식과 배우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전개가 익숙하지 않은 관객이라면 공연 초반에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다만 작품이 전개될수록 배우의 연기와 이야기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빠져들며 이러한 낯섦은 점차 몰입감으로 바뀐다.
'플리백'은 웃기지만 마냥 유쾌하지 않고, 거칠지만 누구보다 솔직한 작품이다. 김규남 배우의 새로운 얼굴을 만나고 싶다면, 그리고 1인극이 처음이라면 충분히 추천할 만한 공연이다. 배우 한 명만으로도 공연장이 얼마나 꽉 찰 수 있는지, 90분 동안 직접 확인하게 될 것이다.
[셀럽미디어 박수정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티브이데일리, 연극 '플리백'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