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아닌 기억을 이야기하다…'더 컴업펀스'가 바라본 삶의 흔적[리뷰]
입력 2026. 08.06. 17:36:25

'더 컴업펀스'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들. 반가운 추억과 근황이 오갈 것 같은 재회의 순간은 곧 불편한 기억과 마주하는 시간이 된다. 연극 '더 컴업펀스'는 한밤중 모인 다섯 친구를 통해 죽음, 상실, 관계 그리고 시간이 남긴 흔적을 들여다본다.

연극 '더 컴업펀스'는 미국 연극계에서 떠오르는 브랜드 제이콥스-젠킨스의 작품으로, 극단 바바서커스와 프로젝트 기지개의 합작으로 올해 한국 초연의 막을 올렸다. 제목의 '컴업펀스'(comeuppance)는 인과응보, 자업자득을 의미하는 단어다.

2022년 고등학교 졸업 20주년 동창회가 열리는 날 밤, 에밀리오, 케이틀린, 우르술라, 크리스티나 네 친구는 동창회 장소로 함께 이동하기 위해 먼저 모인다. 추억을 나누며 유쾌한 시간을 보내던 것도 잠시, 불청객 파코가 예고 없이 등장하며 분위기는 급변한다. 술기운 속에 진심과 오해가 뒤엉키며 이들의 관계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작품은 동창회라는 익숙한 소재로 출발되지만 단순한 추억 여행에 머물지 않는다. 이들이 다시 만난 이유는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서로의 현재를 마주하는 순간, 인물들은 외면하던 과거의 자신과도 직면한다.

그 중심에는 에밀리오가 있다. 에밀리오는 극적인 사건으로 설명되는 인물은 아니지만, 시간이 흘러 관계와 사람이 달라지는 모습을 가장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동창이 '과거의 나를 기억해주는 존재'임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다. 끊임없이 과거를 소환하는 에밀리오는 결국 친구들과 함께했던 시절의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에밀리오를 비롯한 다섯 인물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견뎌온 사람들이다. 우르술라는 모임의 분위기를 이끄는 밝고 유쾌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시력을 잃어가는 변화와 가족의 죽음이라는 상실이 자리한다.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듯한 케이틀린과 크리스티나 역시 과거의 관계와 선택, 자신의 정체성 등에 대한 고민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인물 간의 균열을 폭발시키는 파코는 가장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으면서도 과거 타인에게 가해를 더했던 그는 한 인간을 선악으로 쉽게 규정할 수 없게 만든다. 작품은 파코를 단순히 용서하거나 단죄하는 대신, 한 인간 안에 피해와 가해의 경험이 공존하는 복잡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인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상처를 감춘 채 살아간다. 누군가는 웃음으로, 누군가는 번지르르한 겉모습으로, 누군가는 현재의 삶으로 속내를 가린다. 그러나 이들의 재회는 묻어둔 시간을 불러내며 숨겨진 상처를 파헤친다.



'더 컴업펀스'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치는 단연 '죽음'이다. 각 인물들은 중간중간 죽음으로 분해 관객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건넨다. 죽음은 친구들 사이에서 각 인물들의 숨겨둔 이야기와 감정을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죽음'은 인물들이 지나온 시간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죽음은 단순히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삶을 오랫동안 지켜본 목격자에 가깝다. 때로는 유머를 건네고, 때로는 담담하게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는 죽음은, 삶의 끝을 강조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이 언젠가 사라질 기억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는 복잡한 텍스트의 결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쉼 없이 쏟아지는 대사는 인물들이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관계를 유지하려는 방어기제로 작동한다. 또한 끊임없이 오가는 대화 속에서 미세하게 시작되는 관계의 균열 역시 선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작품에서 현실적인 인물과 '죽음'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동시에 표현하는 각 배우들의 연기도 돋보인다. 배우들은 관계 속 인간적인 모습을 그리면서도, 죽음으로 분하는 순간 무대의 공기를 순식간에 바꾸며 극의 밀도를 높인다.



이번 한국 초연에는 에밀리오 역에 김바다, 김시유, 안승균, 케이틀린 역에 주현영, 김민성, 파코 역에 유희제, 김범수, 우르술라 역에 김보나, 조유진, 크리스티나 역에 여승희, 연솔이가 출연한다. 실력파 배우들이 완성해 내는 앙상블이 밀도 높은 대사가 담긴 작품의 매력을 극대화한다.

결국 '더 컴업펀스'가 말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기억이다.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지만, 함께했던 순간들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계속 살아간다. 작품은 끝나버린 순간보다, 그 순간들이 남긴 흔적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극단 바바서커스X프로젝트 기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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