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 피어난 역사의 연대…연극 ‘더 헬멧’이 되살린 기억의 공간[리뷰]
입력 2026. 08.19. 17:03:04

'더 헬멧'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하나의 무대 위에 거대한 벽이 들어서고, 공간은 순식간에 두 개의 방으로 쪼개진다. 같은 시간, 벽을 사이에 두고 나눠진 관객들은 서로 다른 시점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마주하게 된다.

연극 '더 헬멧'은 민주화 운동 시기를 배경으로 한 '룸 서울'과 시리아 내전 속 알레포를 배경으로 한 '룸 알레포', 두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각 에피소드는 하나의 벽을 사이에 두고 스몰룸과 빅룸에서 서로 다른 인물의 시선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작품의 제목이자 중심 오브제인 '헬멧'은 두 에피소드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서울 에피소드에서 헬멧이 공권력의 폭력과 진압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등장한다면, 알레포 에피소드에서는 생명을 구하는 민간구조대 '화이트 헬멧'을 상징하며 대비를 이룬다.



'더 헬멧'은 관객에게 의도적으로 제한된 시선을 부여한다. 무대 중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벽을 사이에 두고 스몰룸과 빅룸으로 객석을 분리해, 관객이 한 회차에 오직 한쪽 방의 시점만 선택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물리적 한계가 '더 헬멧'이 선보이는 독창적인 연출의 출발점이 된다. 두 공간은 완전히 단절되어 있지 않다.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은 소리와 대사로 다른 공간에 도착하고, 때로는 두 이야기의 시간이 정확히 맞물리며 하나의 장면을 만들어낸다.

시각이 제한된 무대 위에서 연극은 관객의 시각과 청각을 통해 상상력을 극대화한다. 관객은 자신이 속한 방의 풍경을 보는 동시에, 벽 너머에서 넘어오는 감각의 조각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함께 만들어나간다. 스몰룸에서는 빅룸의 큰 소리들이 들려오면서 바깥에서 벌어지는 위험이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반대로 빅룸에서는 스몰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기에, 관객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스스로 상상하게 된다.

결국 공간의 분할은 제한된 정보를 전달하고, 이는 관객에게 긴장감으로 다가온다. 스몰룸의 관객에게 빅룸의 폭력과 혼란은 오직 벽을 뚫고 들어오는 음향으로만 전달되고, 바깥의 위험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에 고립감과 공포는 배가된다. 반대로 빅룸에서는 벽 너머의 생사나 구체적인 상황을 볼 수 없어, 관객은 보이지 않는 곳의 상황을 끊임없이 상상하게 된다.

이로 인해 한 쪽 방의 관람을 마친 관객은 자연스럽게 건너편의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반대편 룸의 예매 창을 열게 된다. 이 같은 시선의 사각지대는 관객에게 묘한 호기심을 남기며, 보이지 않았던 반대편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해 기꺼이 재관람을 선택하게 만든다.

어느 방을 먼저 선택하느냐에 따라서도 극을 받아들이는 감각이 달라진다. '룸 서울'을 빅-스몰 순으로, '룸 알레포'를 스몰-빅 순으로 관람했을 땐, 풀리지 않던 맥락과 숨은 의미들이 차례로 연결되는 퍼즐 같은 쾌감이 있다. 반대로 사건의 맥락을 먼저 파악할 수 있는 순서로 관람한다면 인물들의 상황과 서사를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관람 순서 역시 '더 헬멧'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된다.



여기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공간의 변주와 타이밍의 정교함이다. 처음에는 하나의 공간으로 존재하던 무대가 두 개의 방으로 쪼개지면서 고립과 대립의 현장으로 바뀐다. 이후 분리된 두 공간의 서사가 전개되다가, 정교하게 계산된 오디오 큐와 배우들의 호흡을 통해 순간적으로 동시에 연결되는 찰나가 찾아온다.

시리아 알레포 내전 현장에서 빅룸의 구조대원이 스몰룸의 아이를 향해 말을 건네는 순간, 그리고 1980년대 서울의 서점 지하 밀실에 숨은 대학생들을 향해 빅룸의 백골단이 협박을 쏟아내는 순간이 그렇다. 자연스럽게 두 공간이 하나의 이야기로 합쳐지는 순간 관객은 정교하게 계산된 연출의 쾌감과 함께 인물이 처한 상황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특히 알레포 에피소드에서는 빅룸과 스몰룸을 바쁘게 넘나드는 배우들의 움직임 역시 이 극만의 매력이 된다. 두 공간을 오가는 배우들의 움직임은 재난 현장의 치열함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동시에, 분리된 두 공간의 서사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배우들의 움직임 자체가 두 공간을 연결하는 또 하나의 장치인 셈이다.

이와 같은 연출적 구조를 소화하는 배우들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배우들은 각 에피소드에 따라 완전히 다른 대본을 숙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캐릭터의 결마저 극단적으로 바꿔낸다. '룸 서울'의 서늘한 백골단이었던 배우가 '룸 알레포'에서는 피해자인 어린아이로 분하는 등, 동일한 배우가 보여주는 180도 다른 연기 변신은 관객에게 색다른 몰입감을 선사한다.



'더 헬멧'이 더욱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두 이야기가 무대 위에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1980년대 서울의 백골단과 밀실에 갇힌 청춘들의 이야기는, 최근 사회적으로 연이어 불거진 역사인식 논란 등 오늘날의 현실적 사건들과도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더 헬멧'은 그 기록을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알레포 역시 마찬가지다. 먼 이국의 이야기지만, 무대 위에서는 지금 눈앞에서 두려워하고, 기다리고, 서로를 지키려는 사람들로 존재한다. 단지 국경과 시공간이 다를 뿐, 서로를 구하려는 '화이트 헬멧'의 손길은 1980년대 서울의 지하 밀실에서 체온을 나누던 대학생들의 연대와 일맥상통한다.

두 개로 나뉘었던 무대는 공연이 끝나면 다시 하나의 공간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관객에게 남는 이야기는 하나가 아니다. 벽 너머에서 들려오던 소리와 보이지 않는 공간을 상상했던 순간, 서로 다른 공간의 이야기가 정확히 맞물렸던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알레포와 서울은 서로 다른 시공간의 이야기지만,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의 손을 잡았던 사람들의 모습은 맞닿아 있다. 결국 '더 헬멧'이 두 개의 방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서로 다른 역사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벽 너머에도 누군가의 삶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하며, 과거의 역사를 지금, 여기의 질문으로 끌어온다.

'더 헬멧'은 오는 10월 11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아이엠컬처 제공]

더셀럽 주요뉴스

인기기사

더셀럽 패션

더셀럽 뷰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