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들 보는 만화’ 옛말…SF·K팝·청불까지, 판 넓히는 K애니 [Ce:포커스]
- 입력 2026. 08.31. 05:00:00
- [셀럽미디어 전예슬 기자] ‘아이들이 보는 만화’라는 꼬리표를 떼기 시작했다. 귀여운 캐릭터를 앞세운 가족물부터 인공지능(AI)을 소재로 한 SF, K팝 판타지, 사회의 폭력성을 파고드는 청소년관람불가 하드보일드까지. 한때 극장가의 틈새 콘텐츠로 여겨졌던 국산 애니메이션이 장르와 관객의 경계를 허물며 영역을 넓히고 있다.
'사랑의 하츄핑: 고래보석의 전설', '사랑의 하츄핑'
특히 올여름 극장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 등장한 작품들의 면면은 이전과 확연히 다르다. ‘사랑의 하츄핑: 고래보석의 전설’이 검증된 캐릭터 지식재산권(IP)을 등에 업고 가족 관객을 끌어들이는 동안 ‘나노리스트’는 SF·액션으로 청소년과 성인을 겨냥했다. ‘길 위의 뭉치’는 유기견을 통해 공존의 메시지를 던지고, ‘고스트밴드’는 K팝을 애니메이션 한복판으로 끌어왔다. 여기에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는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의 하드보일드 장르로 국산 애니메이션의 스펙트럼을 더욱 넓혔다.
단순히 국산 애니메이션 개봉작이 늘어난 것만은 아니다. ‘누가 애니메이션을 보는가’, ‘어떤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답 자체가 달라지고 있는 셈이다.
◆‘하츄핑’이 증명한 흥행 가능성…가족물 밖으로 나온 K애니
국산 애니메이션 시장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숫자로 보여준 작품은 ‘사랑의 하츄핑’이다. 2024년 개봉한 ‘사랑의 하츄핑’은 누적 관객 124만명을 동원했다.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 3D’ 이후 12년 만에 100만 관객을 넘어선 국산 애니메이션으로 이름을 올렸다.
흥행은 후속작으로 이어졌다. 지난 5일 개봉한 극장판 3부작의 두 번째 작품 ‘사랑의 하츄핑: 고래보석의 전설’은 누적 관객(8월 29일 기준) 80만명을 넘어섰다. 할리우드 대작들이 포진한 여름 극장가에서도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지키며 국산 캐릭터 IP의 저력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하츄핑’의 강점은 영화 한 편에 그치지 않는다는데 있다. TV 애니메이션에서 출발한 ‘캐치! 티니핑’ IP는 완구와 캐릭터 상품을 거쳐 극장 영화로 영역을 넓혔다. 영화의 흥행이 다시 캐릭터와 상품의 소비로 이어지는 구조다.
이 같은 성과는 국내 영화·콘텐츠 업계가 애니메이션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변화를 주고 있다. 대규모 제작비가 투입되는 실사 상업영화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투자 부담을 낮출 수 있는데다, 흥행에 성공한 캐릭터 IP는 굿즈와 라이선싱 등 다양한 부가 사업으로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영화계에서는 실사영화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애니메이션을 배급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지로 바라보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다만 최근 K애니메이션의 흐름에서 더욱 눈에 띄는 것은 모두가 ‘제2의 하츄핑’을 좇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지난 17일 티빙에서 공개된 ‘나노리스트’는 민송아 작가의 동명 네이버웹툰을 원작으로 한 SF·액션 애니메이션이다. 2050년을 배경으로 고등학생 안도진과 안드로이드 나노의 이야기를 그린다.
어린이나 가족 관객이 아닌 청소년과 성인이 즐길 수 있는 장르적 재미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인기 웹툰 IP의 영상화가 주로 드라마와 영화로 향했던 것과 달리 원작의 시각적 세계를 애니메이션으로 확장했다는 점에서도 기존 국내 상업 애니메이션과 결을 달리한다.
극장에서도 다른 선택지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19일 개봉한 ‘길 위의 뭉치’는 한국 애니메이션 최고 흥행작 ‘마당을 나온 암탉’을 만든 오성윤·이춘백 감독의 2019년작 ‘언더독’을 4K로 뉴마스터링하고 재편집한 작품이다.
주인에게 버려진 뭉치가 거리의 개들을 만나 자유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유기견과 인간의 공존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동물 캐릭터들의 모험 안에 담았다. 기존 102분의 러닝타임을 93분으로 줄이고 음악과 대사 등을 보완해 작품의 메시지를 보다 선명하게 다듬었다.
특히 ‘길 위의 뭉치’는 국산 애니메이션의 또 다른 숙제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언더독’은 6년의 제작기간을 거쳐 완성돼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2019년 개봉 당시 누적 관객 약 19만 명에 그쳤다.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과 관객에게 이를 알리고 극장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점을 보여준다.
◆K팝부터 ‘청불’까지…더 이상 장르는 하나가 아니다
지난 26일 롯데시네마에서 단독 개봉한 ‘고스트밴드’는 또 다른 방향으로 K애니메이션의 영역 확장에 나섰다.
‘고스트밴드’는 영혼을 보는 싱어송라이터 미타가 악기에 깃든 고스트 4인방과 밴드를 결성해 콘서트 무대에 도전하는 판타지 K팝 애니메이션이다.
작품은 기획부터 완성까지 약 4년, 스토리 개발에만 2년 이상을 투입한 오리지널 창작 애니메이션이다. 이미 인지도를 확보한 캐릭터나 웹툰을 원작으로 삼는 대신 처음부터 자체적인 캐릭터와 세계관을 구축했다.
무엇보다 한국 대중문화 자체를 애니메이션의 재료로 삼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홍대와 연남동, 한강 등 서울의 익숙한 공간을 배경으로 삼고 한국 전통 가면인 ‘방상시 탈’에서 캐릭터 디자인의 모티프를 가져왔다. 대형 기획사와 음원 차트 경쟁, 사이버 레카 등 실제 K팝 산업을 연상시키는 요소도 극 안에 녹였다.
음악 역시 작품의 핵심 경쟁력이다. 윤상이 음악감독을 맡고 가수 경서가 주인공 미타의 노래를 불렀다. 윤상의 대표곡 ‘달리기’를 밴드 스타일로 재해석하는 한편 ‘디어 스타’(Dear Star), ‘용기를 내볼게’ 등 신곡을 통해 캐릭터와 음악을 동시에 소비할 수 있도록 했다.
반대편에는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가 있다.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는 인간이 되려는 돼지와 짐승이 되려는 인간이 뒤엉킨 세계를 그린 하드보일드 애니메이션이다. 시스템의 통제와 폭력, 인간성의 본질을 파고드는 작품으로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았다.
제작 방식에서도 기존 작품과 차별화했다. 모션캡처와 3D 블렌더 툴을 활용하면서 2D 애니메이션의 거친 질감을 결합했고, 배우 한우진이 30여 개 캐릭터의 움직임을 직접 연기했다.
상업적인 가족 애니메이션인 ‘하츄핑’과 청소년관람불가 하드보일드인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가 같은 시기 극장에 걸렸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의 K애니메이션이 얼마나 넓어진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어린이 콘텐츠’ 넘어 하나의 산업으로…관건은 결국 관객
최근 작품들의 공통점은 오히려 ‘공통점이 없다’는데 있다. ‘하츄핑’은 캐릭터 팬덤을 가족 관객으로 연결하고, ‘나노리스트’는 웹툰 IP를 기반으로 SF·액션 장르를 택했다. ‘길 위의 뭉치’는 한국적 풍경과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드라마를, ‘고스트밴드’는 K팝과 음악을 전면에 내세웠다.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는 성인 관객을 겨냥한 장르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두드린다.
원천 IP의 출발점도 제각각이다. 이미 팬덤을 확보한 캐릭터 IP부터 인기 웹툰, 감독의 오리지널 스토리까지 제작 방식이 다양해졌다. 공개 창구 역시 극장에 국한되지 않고 OTT로 확장됐다.
국산 애니메이션이 곧 어린이용이라는 등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다만 작품 몇 편의 등장만으로 K애니메이션의 ‘부활’을 선언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한국 극장 애니메이션 시장에서는 여전히 디즈니·픽사를 비롯한 할리우드 작품과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력이 강하고, 작품의 완성도가 흥행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러 사례를 통해 확인됐다.
결국 관건은 넓어진 장르가 넓어진 관객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다. 콘텐츠업계에서는 ‘하츄핑’이 확인한 국산 애니메이션의 흥행 가능성을 서로 다른 장르의 작품들이 이어받는다면 K애니메이션 역시 할리우드와 일본 애니메이션 사이에서 독자적인 시장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업계에서는 애니메이션의 경쟁력을 단순한 극장 관객 수만으로 평가하기보다 캐릭터와 음악, 웹툰 등 원천 IP의 확장 가능성과 OTT를 통한 유통 다변화까지 함께 살펴봐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츄핑’에서 출발해 SF와 K팝을 지나 청소년관람불가 하드보일드까지. 아직 K애니메이션의 ‘전성시대’를 말하기에는 이르지만 한 가지 변화만큼은 분명하다. 이제 한국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만 고민하지 않는다.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보여줄 것인지 선택지를 넓혀가고 있다.
[셀럽미디어 전예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바이포엠스튜디오('사랑의 하츄핑: 고래보석의 전설'), 티빙('나노리스트'), 팝엔터테인먼트('길 위의 뭉치'), NEW('고스트밴드'), 인디스토리('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