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메이크’ 넘어 ‘재창조’…국경·장르 허무는 K콘텐츠 IP [Ce:포커스]
- 입력 2026. 09.16. 15:00:00
- [셀럽미디어 전예슬 기자] 한국 영화는 일본 드라마가 되고, 한국 드라마는 인도네시아 극장용 영화로 다시 태어난다.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속편이 해외에서 만들어져 또 다른 국가로 수출되는가 하면, 20여 년 전 국내에서 선보인 작품이 할리우드 거장과 만나 세계 시상식의 주목을 받기도 한다.
'2nd Miracle in Cell No. 7', '태양의 후예 인도네시아'
K콘텐츠의 글로벌 진출 공식이 달라지고 있다. 완성된 작품을 해외에 판매하거나 인기작의 리메이크 판권을 수출하던 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한국에서 탄생한 ‘이야기’ 자체가 국경과 장르, 플랫폼을 넘나들며 새로운 콘텐츠로 재생산되고 있다. 현지화의 개념도 단순히 언어와 배우를 바꾸는 것을 넘어 포맷과 캐릭터를 변주하고, 새로운 후속작과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단계까지 확장되는 모습이다.
가장 눈에 띄는 사례는 2013년 개봉한 영화 ‘7번방의 선물’이다. 류승룡 주연의 원작은 국내에서 천만 관객을 동원한 뒤 인도네시아, 튀르키예, 필리핀 등 여러 국가에서 리메이크되며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흥행 IP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2022년 선보인 리메이크작의 흥행을 토대로 한국 원작에는 없는 속편 ‘2nd Miracle in Cell No. 7’을 자체 제작했다. 이렇게 탄생한 속편이 다시 필리핀으로 건너가 현지 버전으로 리메이크돼 오는 12월 25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한국 원작을 A국이 리메이크하고, 그 작품에서 파생된 새로운 이야기를 B국이 다시 리메이크하는 이례적인 구조다. 원작 한 편의 판권을 한 차례 판매하는데 그치지 않고 해외에서 새롭게 확장된 IP가 다시 다른 국가로 이동하며 또 다른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원천 IP를 보유한 NEW 역시 인도네시아 속편 판권의 필리핀 수출 과정에서 추가 수익을 확보하게 됐다.
‘7번방의 선물’이 리메이크 이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면, ‘태양의 후예’는 콘텐츠의 형식 자체를 바꾼다.
2016년 최고 시청률 38.8%를 기록하며 국내외에서 흥행한 드라마 ‘태양의 후예’는 방영 10주년을 맞아 인도네시아 극장용 영화 ‘태양의 후예 인도네시아’(가제)로 재탄생한다. 16부작 드라마가 해외에서 한 편의 영화로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다.
특히 이번 프로젝트는 리메이크 판권을 넘기는데 머물지 않는다. 원작 제작사 NEW가 기획과 제작 등 프로덕션 과정에 직접 참여한다. 인도네시아의 정서와 배경을 입히되 원작사가 현지 제작진과 함께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방식이다. 촬영을 마친 작품은 현재 후반 작업 중이며 내년 인도네시아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장르와 플랫폼을 뛰어넘는 변주는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정우성·김향기 주연의 영화 ‘증인’은 일본에서 단편 드라마로 리메이크됐다. 극장에서 2시간여 동안 관객과 만났던 이야기가 일본에서는 안방극장에 맞는 형식으로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할리우드로 향한 한국 영화들은 더욱 과감한 변화를 거친다. 2019년 개봉한 마동석 주연의 범죄 액션 영화 ‘악인전’은 파라마운트 픽처스에서 영어 리메이크를 준비하고 있다. 특히 ‘쏘우’, ‘컨저링’, ‘아쿠아맨’ 등을 연출한 제임스 완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원작에서 조직폭력배 보스 장동수 역을 맡았던 마동석이 리메이크에서도 주연과 제작자로 참여한다. 한국에서 탄생한 작품과 캐릭터를 할리우드 시스템으로 옮기면서 원작의 핵심 창작 주체까지 글로벌 프로젝트에 직접 합류하는 형태다.
장준환 감독의 2003년 영화 ‘지구를 지켜라!’는 리메이크를 통한 재창조 가능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연출한 영어 리메이크 ‘부고니아’는 원작에서 백윤식이 연기했던 중년 남성 기업인을 엠마 스톤이 맡은 젊은 여성 CEO로 바꾸는 등 시대와 문화에 맞춰 캐릭터와 설정을 과감하게 변주했다.
원작의 핵심적인 설정을 가져오되 이를 그대로 복제하기보다 새로운 창작자의 시선과 시대상을 더한 것이다. 그 결과, ‘부고니아’는 한국 영화의 할리우드 리메이크라는 화제성을 넘어 작품 자체로 세계 영화계의 평가를 받았다. 제98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여우주연상·음악상·각색상 후보에 올랐으며 제79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 음악상, 각색상 등 5개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이 같은 변화는 개별 작품의 리메이크에만 머물지 않는다. 국내 콘텐츠 기업들도 해외 파트너와 처음부터 IP를 함께 개발하고 각 시장에 맞게 재창조하는 방식으로 글로벌 사업의 범위를 넓히고 있다.
SLL은 최근 프랑스 기반의 유럽 미디어 그룹 미디어완과 손잡고 양사가 보유한 드라마 포맷 가운데 유럽과 한국에서 각각 리메이크할 작품을 검토하기로 했다. 기존 IP뿐 아니라 오리지널 콘텐츠를 기반으로 양사의 창작·제작 역량과 현지 네트워크를 결합한 글로벌 공동제작도 모색한다. 한국 작품을 해외에 판매하는 일방향 구조를 넘어 한국과 해외 제작사가 서로의 IP를 현지화하고 새로운 콘텐츠를 함께 개발하는 양방향 구조로 확장되는 것이다.
결국 최근의 해외 리메이크 흐름에서 눈여겨볼 지점은 ‘어느 나라에서 어떤 한국 작품을 다시 만드느냐’만이 아니다. 하나의 원천 IP가 얼마나 다양한 문화권에서 다시 해석되고, 새로운 포맷과 후속작으로 확장돼 또 다른 시장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가 중요해지고 있다.
한 편의 흥행작을 해외에 판매하는 것으로 끝나던 시대에서 하나의 이야기가 국가와 플랫폼을 옮겨 다니며 수명을 연장하는 시대로 접어든 셈이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해외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낳고, 그 이야기가 다시 다른 나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K콘텐츠의 글로벌 경쟁력이 이제 ‘얼마나 많이 수출했느냐’를 넘어 ‘얼마나 오래, 다양하게 확장될 수 있는 IP를 만들었느냐’로 향하고 있다.
[셀럽미디어 전예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NEW('2nd Miracle in Cell No. 7', '태양의 후예 인도네시아'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악인전'), 롯데엔터테인먼트('증인'), CJ ENM('부고니아'), SLL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