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현정이 꺼집어낸 한복 치마 속 ‘내숭 이야기’ [패션다큐 ⑥]
입력 2013. 03.24. 16:40:21
[매경닷컴 MK패션 차평철 기자] “김현정이 내숭을 떨기 시작했다”. 최근 SNS를 중심으로 많은 이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는 젊은 작가의 개인전이 동시다발적으로 열리고 있다. 지난 4일 부산에서 초기 작품을 위주로 한 첫 개인전이 진행된 가운데, 지난 20일에는 서울 인사동 우림갤러리에서 ‘내숭이야기’가 전시됐다. 더욱이 이번 서울 초대전은 2012년 한국미술경영연구소가 주관한 ‘한국 미술대학원생 신예유망작가 기획초대전’에서 그가 한국화 부문 우수작가로 선정돼 기획된 것이다.
그의 최근 작업은, 한지위에 수묵담채 그리고 콜라쥬 기법을 이용해 한복을 입은 젊은 낭자의 다양한 자태를 그린 것이다. 직접 본 작품은 아름다운 곡선의 흐름 속, 표정이 생생하고 태도는 당당했으며, 속이 비치는 한복 치마는 생각보다 야해서 조금 당혹스러웠다. 막 설치를 끝낸 갤러리에서 조용히 그림을 응시를 하니, 마치 영화 스캔들 속 배용준이 되어, 버선발로 엎드려 옆집 도령에게 편지를 쓰는 이소연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그에게 ‘내숭 시리즈’로 자화상을 선택한 이유를 묻자, 그는 "여성 모델을 생각하던 중, 가장 손쉬운 자신을 택했다"라고 답한다. 또 "이전에도 이미 많은 자화상을 그렸기에 어색함은 없었다"라면서, 따라서 단순한 모델 외에 그림 속 인물에게 자신을 투영하지 않았지만, 어느 날 문득 그 대상 역시 자기 자신임을 깨닫게 됐다고 덧붙인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은, 결국 그 안에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라는 말처럼, 그는 “내숭 역시 제 모습이지만 처음에는 부정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결국 그 역시 구두와 쇼핑을 좋아하는 여느 여자들의 모습이 있음에도, “난 그 정도는 아니야”라고 여겼다고. 그는 “이게 결국 내 이야기인데, 괜히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라며 선선히 웃었다.
내숭이라는 주제는 그가 만나온 사람들의 앞 뒤 다른 모습을 목격하고 상처받기도 하면서, “과연 그들의 의도가 나쁜 것만 이었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또 이런 고민이 “본래 악의는 없지 않았을까”라는 긍정적인 이해로 이어지며, “한복이라는 아름다운 옷을 입고, 어쩌면 우아하지 못한 행동을 해보자”는 젊은 작가 특유의 엉뚱하고 발랄한 표현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한복을 입고 떨잠과 비녀로 머리장식까지 한 여인이, 부루스타 위에 끓는 양은냄비 뚜껑에 라면을 먹으며 루이비통 가방과 스타벅스 테이크아웃 잔을 바라본다. 수년 전 된장녀 논란이 한창일 때, 20대 여성들이 돈을 아껴 명품을 산다는 뉴스는 많은 지탄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런 팍팍한 현실과 솔직한 욕망을 그림 한 장에 유쾌하게 풀어냈다. “보통의 여성들이 덮어놓고 외제나 해외명품을 좇기도 하는데, 그게 제 모습이라고 느끼기도 해요. 따라서 그런 모습을 타인의 시선으로 전달하려고 했어요”
“처음에는 어떤 걸 이야기 하면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 하면서, 제가 속한 20대들의 욕망을 생각했어요. 가령 쇼핑의 경우 제가 최근에 일 년에 한 두 번 할 정도로 바빴지만, 그때만큼은 누구보다 즐기고 있더라고요. 여느 여성들처럼 스트레스 해소라고 생각하는 것 같고요. 또 은근히 중독의 성향이 있다고 생각했던 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인터넷 쇼핑몰이라도 구경을 해야 되요. 돈이 없으면 다이소 같은 곳도 가구요”
전시된 그림 중에는 두 손 가득 쇼핑백을 걸고 그 위로는 큰 상자까지 짊어진 여인이 벗겨진 오른쪽 당혜를 돌아보는 모습이 있다. 마치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간 조선시대 규수가, 폐점시간을 앞두고 마음이 급해 계산대로 바삐 걷다 벌어진 장면 같다고 할까. “라면을 먹는 장면과 신발이 벗겨진 것 모두 ‘아차(我差)’라고 제목을 지었어요. 그건 쇼핑할 때 “아차”싶은 순간이기도 하지만, 나 ‘아’(我)자에 모자를 ‘차’(差)자를 써서 스스로의 부족함을 표현하는 것이에요”
또 다른 그림에는 매니큐어를 바르고 한복을 입고 앉은 여인이 샌들과 당혜, 하이힐과 웨지힐 그리고 털이 달린 짧은 부츠 등을 놓고 뭘 신을까 고민하는 장면도 있다. “구두를 들고 있는 그림도, 저의 어머니가 아침마다 장에 놓인 구두를 보면서 뭘 신을까 하는 모습이, 제게도 있는 걸 보면서 제목으로 빌 공(空)을 써놨어요. 보통 사도 사도 마땅히 입을 옷과 신을게 없다고 느끼잖아요. 그런 허무함과 기쁨 모두를 표현한 것이에요” 한편 선의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한복은, 영화 '광해'의 한효주처럼 우아함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또 '음란서생'의 김민정처럼 굉장히 야릇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의 그림 속 여인들은 청순한 표정을 짓고 ‘내숭’이라는 주제로 모여 있지만 맨살이 투영되는 한복을 입고 있어, 순진한 총각을 부끄럽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최근 남녀공학 학교에서 기를 펴지 못한다는 남학생들처럼.
“제가 한복을 그리기 전에 먼저 누드를 그리고 그 위에 한복을 입히거든요.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3배로 걸리는데도 그 방법을 고집하는 이유는, 넓은 치마 속에 감춰진 이야기를 꺼내고자 하는 의도가 있어요. 그 안의 누드를 꼼꼼히 그리는 게 옷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또 꼭 한복이 아닌 어떤 사건에서도 실제로는 무슨 일이 있는가 얘기하고 싶기 때문에 에로틱 하지만 다 표현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페미니즘 적으로 묶일 수 있다고 봐요. 한국에서 여성이 누드로 보여 진다는 것도 그렇고요. 제가 사실 넌 여자니까 하는 이야기에 반발심이 있어요. 여자라면 왜 못 벗어? 이게 나쁜 건가? 같은 생각을 최대한 솔직히 풀어내고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2012년에 제 그림 중 3점이 핸드폰 케이스로 나왔는데 처음에는 부모님이 반대하셨어요. 너의 얼굴이기도 하고. 이게 야한 측면도 있는데 안 하는 게 좋겠다고. 하지만 지금은 지지해 주시고요, 가끔 아빠는 농담처럼 여긴 좀 가리라고 얘기 할 때도 있어요”
얼마 전 박원순 시장의 한복 패션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보통 멋진 한복을 차려입고도 검정구두로 아쉬움을 주었던 유명인들에 비해, 그는 버선에 갓신까지 꼼꼼히 챙겨 신어 우아한 멋을 자랑한 것이다. 따라서 그림 속 여인의 한복에 대해 질문했다.
“어느 정도는 구입을 했고요. 어머니 것도 빌려 입고. 또 박술녀 선생님 한복을 주로 많이 입어요. 박 선생님은 우연히 친척 결혼식 준비를 하다 인연을 맺게 됐어요. 또 그림 속 어떤 것은 제가 색만 바꾼 경우도 있고요"
얼마 전 생존 최고의 한국작가로 꼽힌 서도호나 2012년 플라토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 배영환처럼, 미술에서 전공을 구분 짓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우리 미술계에서 팝아트 열풍이 불어 닥친 후, 젊은 작가에게서 전통소재나 기법을 발견하는 것은 조금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한지와 수묵을 사용한 이유를 물어봤다. “제가 그림을 그리는 그리는 한지는 미사라지 순지라는 종이에요. 일본말로 미사라지가 또 순지를 뜻한다고 하니 우리말로 하면 ‘순지 순지’가 되겠죠? 자유로운 먹 번짐과 디테일을 위해서 미사라지 순지 중에 제일 얇은 안피라는 종이를 써요. 하지만 어려운 점은 워낙 얇다보니 그리다 터지기도 해요. 말려놓고 오면 갈라져 있기도 하고요”
“저는 유화나 아크릴에 비해서 분명 한국화가 갖고 있는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비치고 겹쳐지면서도 투명한 기분이 좋아요. 유화는 두터워 질수록 완성도가 높아질 수 있지만. 한국화는 겹치면서 더 투명해지거든요. 사실 그런 미술 재료가 거의 없어요. 그래서 한국화 재료는 제가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소재기도 하고 또 그만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어요”
단 한사람만이라도 자신의 그림을 좋아해준다면 그림을 그리고 싶다던 김현정 작가. 하지만 6월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10월 재동갤러리에서 열리는 연이은 초대전은, 등장과 함께 그의 그림 속 치맛자락에 푹 쌓인 관객들이 많다는 반증 아닐까.
[매경닷컴 MK패션 차평철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 진연수 기자, 우림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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