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이야말로 슈퍼 甲? ‘뷰티 업계 감정노동자’의 눈물 [갑을 대격돌 ⑥]
입력 2013. 05.16. 13:59:25

[매경닷컴 MK패션 이예원 기자] “요즘 여기저기서 ‘갑·을 관계’가 화두죠. 저 역시 다른데 가서는 철저하게 ‘갑’ 행세를 해요. 제가 손님한테 받은 수모를 그대로 돌려주는 거에요. 이렇게 누구든 어떤 상황에 놓이느냐에 따라 갑이 되었다 을이 되기도 하죠“
백화점 화장품 코너에서 일하는 A씨는 이 일을 시작한 후, 이유 없이 시비를 거는 손님들을 자주 접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일상생활에서도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불안 증세를 겪고 있다고 한다. 백화점 안에 제대로 된 휴게실이 마련되지도 않아 화장실이나 비상구에 잠깐 피신해 한숨 돌리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것도 긴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 상처는 점점 깊어지고 결국 신경안정제를 찾는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손님이 왕’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이 ‘고객만족경영’을 기조로 삼으면서 ‘소비자=왕’이라는 시각이 팽배해졌다. 출근하면 철저히 ‘을’의 입장인 사람이 회사 밖을 나서면 최상의 서비스를 받으려는 ‘갑’이 되어 또 다른 ‘을’인 직원들에게 폭언을 일삼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A씨처럼 감정을 숨긴 채 업무를 수행하는 이들을 가리켜 ‘감정노동자’라고 부른다. 지난해 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 전체 고용인구 1,600만 명 중 70%에 달하는 1,200만 명이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이 중 감정노동자는 600만 명으로 추산된다.
5월 14일에는 증가하고 있는 감정노동자들의 고충을 직접 듣는 토론회 ‘사랑합니다, 고객님! 웃다가 멍든 우리들의 이야기’가 서울시 여성가족재단 주최로 서울여성플라자에서 개최됐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한인임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연구원은 "친절교육이나 친절 자체가 나쁜 요소는 아니지만 ’강요된 친절’이라는 게 문제"라며 "부당한 상황에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어떤 수단이나 방법도 없다"고 감정노동자들이 직면한 현실을 꼬집었다.
현재 우리나라는 화장품 판매직이나 관련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겪고 있는 정신질환이 산업 재해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일본은 일명 ‘진상 고객’에 대해 백화점 차원에서 따로 관리하고 그들에게 ‘점원을 방해하는 행위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경고장을 날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은 직무 스트레스를 서비스업까지 광범위하게 적용해 이를 산업재해로 인정하고 있다. 또한 2000년부터는 직장에서 받는 직무 스트레스를 차별행위라고 간주하여 법을 통해 이를 처벌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로레알코리아와 샤넬, 클라란스, 부루벨코리아, 엘카코리아 등에서 감정노동의 가치를 인정해 매달 소액의 ’감정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특히 로레알코리아는 2010년부터 전 직원을 대상으로 근로자 직무 스트레스 해소 프로그램(EAP, Employee Assistance Program)을 시행 중이다. 노조가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 시행 사례를 연구한 후 단체협약을 통해 프로그램을 실현했다.
업계 관계자에 의하면 이런 제도 역시 노동조합이 설립된 곳만 아주 소규모로 시행 중이거나 제도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아울러 외국처럼 외부의 상담 전문가팀이 결성돼 화장품 판매직이나 관련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직원을 돌보기에는 시간적, 경제적 요건이 갖춰지기 힘든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나온 A씨처럼 뷰티 업계 감정노동자들은 고객에게 상처받고 기업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아 두 번 아파하는 상황이다. 정부 차원에서 제도 마련이 힘들다면, 기업이 나서서 감정 노동자들의 문제를 인식하고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그들의 권리를 지켜줘야 할 것이다. ‘갑’으로 군림한 블랙 컨슈머들로부터 철저히 ‘을’의 입장인 뷰티 업계 감정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해 보인다.
[매경닷컴 MK패션 이예원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 AP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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