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이병헌이 걸어온 30년 배우의 길, 끊임없이 발버둥 쳤기에 [인터뷰]
입력 2019. 12.27. 14:41:26
[더셀럽 전예슬 기자] 또 한 번의 도전을 마쳤다. 데뷔 이후 첫 북한 요원 캐릭터를 맡은 그가 진지함과 유머러스함을 오가는 연기력으로 그 진가를 발휘했다. 배우 이병헌의 이야기다.

기자는 최근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백두산’(감독 이해준, 김병서)에서 리준평 역으로 열연한 이병헌을 만나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리준평은 백두산의 마지막 폭발을 막기 위한 결정적 정보를 손에 쥔 북한 무력부 소속 일급 자원. 엘리트 요원다운 숙련된 민첩성과 과감한 행동력으로 ‘액션 장인’ 수식어를 입증했다.

“저보다 감독님들이 더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시사회 전전날 ‘모든 작업을 마쳤습니다’라는 문자가 왔더라고요. ‘촬영 시작하고 지금까지 계속 (편집) 한 거야?’라고 했어요. 우리나라라서 가능한 작업이라 생각해요. 촬영현장도 우리나라 촬영현장 특성상 순발력이 있잖아요. 미국은 준비를 탄탄히 하기 때문에 현장에서 좋은 아이디어를 내도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아이디어가 적용된다고 해도 며칠이 걸리죠. 우리나라는 애드리브가 가능하고 대사, 상황을 변형시키거나 소품을 바꾸는 것들이 현장에서 많이 이뤄져요. 어찌 생각하면 그게 합리적이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게 바로 한국영화의 힘이 아닐까요.”

‘백두산’은 남과 북 모두를 집어삼킬 초유의 재난인 백두산의 마지막 폭발을 막아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이병헌에게 이 영화는 많은 의미를 가진다. 재난 영화 첫 출연이자 북한 요원 캐릭터를 처음으로 맡았기 때문.

“비주얼과 스케일이 큰 재난 영화인데 내용적으로 보면 재난과 버디 무비 느낌이었어요. 차별화된 점이라고 생각했죠. 그것이 다른 배우가 아닌, 하정우 배우라면 재밌는 케미스트리가 생기겠다는 기대감이 있었어요. 보통 재난 영화라고 하면 재난이 있기 전, 어떤 각자의 삶이 분리돼 옴니버스처럼 보이잖아요. 이 영화는 적과의 동침처럼 만나고, 만나기도 힘든 두 인물이 공동의 목표 하나 때문에 치고 박고 싸우면서 목표를 이뤄가는, 고군분투 한다는 점이 끌렸어요. 리준평을 연기하는데 부담도 있었어요. 메인은 북한 사투리지만 목포 사투리도 써야하고 중국말과 러시아말을 해야 했으니까요. 유독 북한 사투리가 많아서 큰 부담이었지만 막상 했을 땐 중국말이 NG가 많이 나더라고요. 반복적으로 연습을 많이 했어요.”



리준평은 베이징 주재 북한 서기관으로 위장 활동을 하다 남측의 이중 첩자임이 발각돼 수감되어 있던 중 조인창(하정우)이 이끄는 비밀 작전에 합류한다. 작전에 협조하는 척하지만 진짜 목적은 숨긴 채 은밀하게 움직여 그 속을 알 수 없다.

“리준평 캐릭터를 처음 설정할 때 ‘저 사람은 뭐지’라는 느낌처럼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로 보였으면 했어요. 날카로운 눈빛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다가 어느 순간 보면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죠. 느슨해지면 날이 서게 이야기를 하고. 그런 캐릭터라 생각했고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리준평 인물이 미스터리해요. 하지만 관객들에게는 그의 전사, 그 사람의 히스토리를 최소한의 레이어를 만들어줘야 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죠. 리준평 입장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특히 EOD 대원들에게는 끝까지 자기를 숨기고 현혹시키려고 해요. 그러나 관객들에겐 짧게라도 들켜야 하죠. 짧은 정보를 관객들에게만 들키고 그 인물의 히스토리를 쌓이게끔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을까요.”

특히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병헌의 뜨거운 부성애는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딸과의 장면은 길었어요. 임팩트가 셌죠. 그 장면을 찍고선 스태프들이 다 박수치고 울었어요. 아역 했던 친구는 저도 너무 깜짝 놀랄 정도로 연기를 잘했어요. 말을 잃은 아이로 나오는데 표정, 눈빛만으로 연기했죠. 감독님이 주문한 게 어려웠어요. ‘저 친구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는데 자기감정으로 다 표현해서 깜짝 놀랐죠. 이 신의 임팩트가 크다보니까 영화의 전체 밸런스를 놓고 봤을 때 퍼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느낌이 슬림하게 바뀌었어요. 편집실에 있었던 분들도 아쉬워한 신이라 어떤 식으로라도 후에 보이지 않을까 싶어요.”



이병헌은 2020년 1월 개봉 예정인 ‘남산의 부장들’을 비롯해 ‘비상선언’ 등 다양한 작품으로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데뷔 이후 쉼 없이 달려온 그에게 꾸준히 연기를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적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 어느 순간 살면서 제 고집이 약해졌더라고요. 이런 것들이 반복되면서인 것 같아요. 옛날에는 ‘내 말 맞지, 내 생각이 맞다’라는 힘으로 살아갔는데 ‘내가 나를 제대로 못 본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요구한 것을 객관적으로 보고 판단하니까 무시를 못하게 됐어요. 모니터를 통해 관객의 입장으로 봤을 수 있으니까 그 말을 무시할 수 없게 된 거죠.”

앞서 이병헌은 영화 ‘내부자들’의 정치 깡패, ‘남한산성’에서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총신, ‘그것만이 내 세상’의 한물간 전직 복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미 해병대 장교 등 매 작품 장르를 불문하고 새로운 변신을 거듭해온 바. 어떤 역할이든 자신만의 색깔을 덧입혀 소화해내는 그이지만 노력을 수없이 반복했기에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내년이면 데뷔 30년을 맞이하는 이병헌. 그냥 걸어온 길이 아닌 연기를 향한 고민의 발자국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길이 분명해 보인다.

“좋은 수식어로 말씀해주시지만 저 안에서는 계속 발버둥 쳐요. 감정을 유지시키려고 발버둥 치고 있죠. 영화는 큰 시퀀스를 하루에 다 찍을 순 없어요. 심지어 일주일 있다가 연결되는 부분을 찍기도 하죠. 감정의 수위를 다시 끌어올리는 싸움을 내면에서 계속 해요. 어느 정도 수위였고 어떤 감정이었는지 기억해내고 애써가는 발버둥이죠. 연결되는 신을 찍을 땐 모니터를 계속 반복해서 보는 것도 도움이 되더라고요. 감정의 크기를 알아야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죠. 감정으로 하기 때문에 그 감정을 유지하는 게 제일 힘들어요. 내면에서는 계속 싸우고 있는 거죠.”

[더셀럽 전예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BH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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