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지만 외면해서는 안될 '엔젤스 인 아메리카' [무대 SHOUT]
입력 2024. 08.27. 11:53:26

'엔젤스 인 아메리카'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인종, 종교, 성 정체성 등의 키워드는 여전히 차별과 함께 붙어 다니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자유를 찾기 위해 맞서 싸우고 있다. 1980년대 미국, 당시 이와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은 어땠을까.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파트원 : 밀레니엄이 다가온다'(이하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밀레니엄, 새 시대의 변화를 앞두고 동성애자, 흑인, 유대인, 몰몬교인, 에이즈 환자 등 사회적 소수자가 겪는 차별과 정체성 혼란을 다룬다. 천사와 인간, 백인 보수주의 환자와 흑인 간호사, 동성애자와 독실한 종교인 등 각기 다른 신념을 가진 캐릭터들이 겪는 혼돈과 고뇌를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미국 연극계의 대가 토니 커쉬너(Tony Kushner)의 작품으로, 1993년 브로드웨이 초연 당시 토니상, 드라마데스크상, 퓰리처상, 뉴욕비평가상을 석권, 2018년 브로드웨이 리바이벌 후에도 토니상, 드라마리그상 등 주요 시상식의 리바이벌 부문을 휩쓸었다. 또한 2003년에는 HBO 미니시리즈로, 그리고 2004년에는 오페라로 각색되어 원작의 뜨거운 인기를 입증하기도 했다.

작품은 1985년 세기말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레이건 집권기에 미국은 매우 보수적이었다. 특히 당시는 에이즈 위기로 인해 미국의 퀴어 공동체를 절멸의 공포로 물들였던 시기로, 동성애자, 유대인, 몰몬교인 등 사회적 소수자들은 많은 차별을 당했다. 이로 인해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사람들 또한 많았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이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에이즈로 투병하는 동성애자 프라이어는 미국 주류 지배 계급인 백인 와스프(WASP, 백인 앵글로 색슨 개신교도) 가문 출신이지만 드래그 퀸(남성이 여성의 옷을 입고 여성성과 여성의 성 역할을 과장해 표현하는 공연자) 출신이다. 프라이어는 유대교도인 루이스를 애인으로 두고 있지만, 루이스는 버거운 현실에 지쳐 프라이어를 버리고 떠나려 한다.

약물중독자 하퍼를 부인으로 두고 있는 몰몬교도 조셉은 남성을 사랑하는 본인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 하루 종일 약물에 취해 있는 하퍼 역시 남편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보수주의 정치계 유력인사이자 변호사인 로이도 동성애와 에이즈라는 설정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이며 에이즈 환자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부정한다. 에이즈 판정을 내리는 의사 앞에서도 '나는 가끔 남자와도 자는 이성애자'라거나 '에이즈가 아닌 간암'이라고 우긴다.

로이는 조셉의 사수이고, 루이스는 조셉이 근무하는 법원의 직원이라는 설정으로 각 인물들의 이야기는 일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주로 이들의 이야기를 번갈아 보여주는 옴니버스 형식으로 흘러간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결코 쉬운 극이 아니다. 약물에 취한 하퍼가 환상을 보고, 프라이머에게 천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등 비현실이 중간중간 교차되어 나온다. 이를 난해하게 받아들이거나 집중이 흐트러지면 흐름을 따라가기 어렵다.

또한 여전히 다수의 사회에서 동성애자가 소수자로 분류되어 극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당시 미국의 시대 배경 등을 알고 봐야 이해할 수 있는 대목들이 있어 일부는 사전 정보를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젤스 인 아메리카'가 매력적인 것은 각 캐릭터의 서사, 그리고 이를 납득시키는 배우들의 연기에 있다. 극에 등장하는 모든 남성 캐릭터는 성소수자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다르다. 이와 같은 캐릭터들의 삶이 번갈아 등장해 오히려 더 다양한 관점에서 극을 바라볼 수 있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는 '프라이어 월터' 역 유승호와 손호준, '하퍼 피트' 역 고준희와 정혜인, '루이스 아이언슨' 역 이태빈과 정경훈, '조셉 피트' 역 이유진과 양지원, '로이 콘' 역 이효정과 김주호, '한나 피트' 역 전국향과 방주란, '벨리즈' 역 태항호와 민진웅, '천사' 역 권은혜 등이 캐스팅됐다. 매체에서 만나볼 수 있던 배우들이 다수로, 특히 유승호, 고준희 등은 이번에 연극 무대에 처음으로 데뷔하게 됐다.

첫 연극에 도전한 유승호는 기대 이상의 연기를 보여준다. 동성애 연기, 드랙퀸 분장 등 지금까지 소화했던 캐릭터들과는 전혀 다른 결이었지만 큰 위화감 없이 극에 스며들었다. 또한 정혜인의 연기도 인상 깊다. 약물 중독으로 인해 불안하고, 우울한 하퍼를 잘 나타내 극의 몰입도를 높인다. 특히 많은 무대 경험을 통해 쌓아둔 양지원의 존재감이 빛을 발한다. 1인 다역을 소화할 때 다른 배우로 착각할 정도로 넓은 연기 폭을 입증했다.

다만 200분이라는 기나긴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이번 공연은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파트1이다. 긴 시간 자리를 지켜도 이야기는 마무리되지 않는다. 파트2에 대한 기대감을 남기지만, 언제 이를 만나볼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 작은 아쉬움을 남긴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오는 9월 28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LG SIGNATURE 홀에서 공연된다.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주)글림컴퍼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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