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엔 붙어야 흥행”은 옛말…사라진 텐트폴 맞대결 [Ce:포커스]
- 입력 2026. 08.03. 11:00:00
- [셀럽미디어 전예슬 기자] 한때 여름 극장가는 한국 영화의 자존심이 걸린 최대 승부처였다. 학생들의 방학과 휴가철이 맞물리며 연중 가장 많은 관객이 극장을 찾는 7~8월이면 투자배급사들은 수백억원 규모의 제작비가 투입된 텐트폴 영화를 앞다퉈 내놓았다. 흥행 가능성이 높은 대작들이 같은 시기에 맞붙는 것은 자연스러운 풍경이었고, 어떤 작품이 여름 시장의 승자가 될지가 극장가 최대 관심사였다.
'호프',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오디세이'
하지만 최근 극장가의 여름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특히 올해는 나홍진 감독의 ‘호프’를 제외하면 한국 텐트폴 영화를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오디세이’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극장가를 채우고 있다. 얼핏 보면 단순히 한국 대작이 줄어든 것처럼 보이지만, 업계에서는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됐다고 입을 모은다. ‘여름이면 한국 텐트폴 영화들이 정면 승부를 펼친다’는 흥행 공식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개봉 라인업만 봐도 변화는 뚜렷하다.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8월 개봉 예정 작품은 29편으로 지난해 같은 달 51편보다 43.1% 감소했다. 코로나19로 극장가가 직격탄을 맞았던 2020년과 2021년보다도 적은 수치다. 한국 영화 역시 지난해 21편에서 올해 12편으로 크게 줄었다. 단순히 한두 편이 빠진 수준이 아니라 여름 극장가 전체의 규모가 눈에 띄게 축소된 셈이다.
과거였다면 이 시기에는 여러 투자배급사의 대작들이 줄줄이 출격했다. 2023년 여름만 해도 류승완 감독의 ‘밀수’, 김성훈 감독의 ‘비공식작전’, 김용화 감독의 ‘더 문’,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며 정면 승부를 펼쳤다. 2024년 역시 ‘파일럿’, ‘탈주’,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행복의 나라’, ‘리볼버’ 등이 여름 시장을 공략했다. 작품마다 흥행 성적은 엇갈렸지만, 적어도 “여름은 한국 대작들의 계절”이라는 공식만큼은 유지됐다.
그러나 올해는 사실상 ‘호프’ 홀로 여름 한국 텐트폴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사이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와 ‘오디세이’ 같은 글로벌 블록버스터들이 차례로 개봉하면서 극장가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해외 작품으로 쏠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케이 마담2’, ‘경주기행’ 등은 코미디나 스릴러 등 장르적 차별화를 앞세워 틈새시장을 노리는 전략을 선택했다. 과거처럼 대작과 정면 승부를 벌이기보다 관객층을 달리 가져가는 방식이다.
이 같은 변화는 단순히 올해만의 현상이 아니라 배급 전략 자체가 달라진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과거에는 여름 성수기에 개봉하는 것만으로도 흥행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경쟁작의 규모와 장르, 예상 관객층, 손익분기점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 개봉 시기를 결정하는 분위기가 더욱 짙어지고 있다.
한 관계자는 “예전에는 성수기에 맞춰 개봉하는 것이 우선이었다면 지금은 어떤 작품과 경쟁하느냐가 훨씬 중요한 기준이 됐다”라며 “특히 ‘호프’처럼 감독 브랜드와 규모를 모두 갖춘 작품이 있으면 정면 승부를 피하는 전략을 택할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여기에는 최근 몇 년간의 흥행 결과도 영향을 미쳤다. 2023년 여름 시장은 대작이 한꺼번에 몰렸지만 결과는 극명하게 갈렸다. ‘밀수’와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흥행에 성공했지만 ‘더 문’과 ‘비공식작전’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대작이 많이 개봉하면 시장 전체가 커질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관객이 분산되면서 일부 작품은 손익분기점조차 넘기지 못했다. 대규모 제작비가 투입되는 상업영화 특성상 한 편의 실패는 다음 투자와 제작 계획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업계가 무리한 정면 승부보다 경쟁을 피하는 전략을 택하게 된 배경이다.
‘서울의 봄’과 ‘파묘’의 성공 역시 시장 분위기를 바꿨다. 두 작품 모두 전통적인 성수기를 피해 개봉했지만 각각 1300만명, 11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흥행을 좌우하는 기준이 계절에서 작품성과 경쟁 환경으로 이동했다는 점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이제는 “언제 개봉하느냐” 보다 “무엇과 경쟁하느냐”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제작 환경 변화에 있다. 코로나19 이후 투자 시장은 크게 위축됐고 제작비는 꾸준히 상승했다. 여기에 OTT 플랫폼이 콘텐츠 소비의 중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투자배급사들의 투자 기준도 한층 보수적으로 변했다. 예전처럼 수백억 원 규모의 상업영화를 여러 편 동시에 추진하기보다 리스크를 줄이는 방향으로 사업 구조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실제 업계에서는 “만들어진 한국 영화 자체가 줄었다”, “올해보다 내년이 더 걱정”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독립·예술영화 역시 배급 비용 부담으로 개봉을 미루거나 공공 지원에 의존하는 사례가 늘면서 시장 전반이 위축된 상황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여름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을 대상으로 제작비를 회수하는 구조인 만큼 국내 시장 의존도가 높은 한국 영화와는 상황이 다르다. 결과적으로 올해 여름 극장가는 한국 영화가 줄어든 자리를 해외 대작이 메우는 모양새가 됐다.
다만 이를 두고 한국 영화 텐트폴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호프’를 비롯해 CJ ENM의 ‘타짜: 벨제붑의 노래’, 쇼박스의 ‘폭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의 ‘몽유도원도’ 등 차기 대작들도 순차적으로 개봉을 준비하고 있다. 달라진 것은 대작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대작들이 시장에 등장하는 방식이다.
과거 여름 극장가는 여러 한국 텐트폴이 한꺼번에 맞붙으며 흥행 열기를 키웠다. 이제는 경쟁작의 규모와 시장 상황을 면밀히 분석해 가장 유리한 시점을 선택하는 것이 새로운 공식이 됐다. 성수기에 무조건 출격하기보다 위험을 분산하는 전략이 보편화됐고, 흥행 역시 계절이 아니라 콘텐츠 경쟁력과 개봉 타이밍이 좌우하는 시대가 열렸다. 여름 극장가에서 사라진 것은 텐트폴 영화가 아니라, 여러 한국 텐트폴이 정면 승부를 벌이던 시대인지도 모른다.
[셀럽미디어 전예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영화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