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벰: 비컴 휴먼’, ‘매트릭스’까지 차용한 실존주의 애니메이션
입력 2022. 06.15. 11:09:30

‘벰: 비컴 휴먼’

[유진모 칼럼] 일본 후지 TV는 1968년 10월부터 1969년 3월까지 ‘요괴인간 벰’을 방송해 성공을 거둔다. 이 작품은 대한민국 TBC(동양방송)에서 1970년대 ‘요괴인간’이라는 제목으로 인기리에 방영된다. 1965년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에 따라 문화 교류 차원에서 일본 제일동화 베테랑 애니메이터들이 동양방송에 파견되어 제작하는 형식이었다.

‘황금박쥐’에 이은 두 번째 합작품. 일본은 2019년 벰 탄생 50주년 기념 TV 애니메이션을 제작해 방영하는데 ‘벰: 비컴 휴먼’(이케하타 히로시 감독)은 그 2년 후의 이야기를 담은 극장 버전이다. 19세기 초 한 과학자가 기존의 인간보다 더 강인한 육체와 올바른 마음씨를 가진 완전한 생명체를 만들기 위하여 실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과학자는 결실을 보지 못하고 숨지고, 실험에 쓰였던 배양액에서 3명의 요괴인간 벰, 베라, 베로가 탄생된다. 3명은 인간이 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하여 기나긴 여정을 거친 끝에 리브라 시티에 간다. 여기서 여형사 소니아와 함께 닥터 리사이클이 만든 요괴인간과, 보이지 않는 의회의 수장 베가로부터 도시를 지켜 준다.

2년 후 소니아는 사라진 3명을 찾아 거대 기업 드라코 케미컬이 있는 섬으로 간다. 드라코는 겉으로는 인간의 삶에 도움을 주는 약들을 생산해 내는 듯하지만 사실은 자사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인간의 삶을 파괴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고 있다. 베라는 신분을 감추고 커피숍에서 일하며 살고, 베로는 인간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소니아는 우연히 만난 드라코 홍보부 직원 벨름을 보고 벰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벨름은 사람 잘못 보았다고 무시한다. 홍보부의 에이스인 벨름은 엠마와 결혼해 슬하에 남매를 두고 있는 평범한 가장인 것. 하지만 이후 벨름은 악몽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자신이 벰이며 드라코의 음모에 희생당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요괴인간 벰’은 당시 일본에 강하게 일기 시작한 요괴 호러물 유행에 편승해 제작되었는데 오늘날에 비춰 보면 다크 히어로물의 선조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세 요괴인간은 평소에도 별로 아름답지 못한 외모인 데다 본래의 모습으로 변하면 매우 그로테스크해진다. 물론 평범한 인간이라면 상상도 못할 초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벰은 전기 충격으로, 베라는 냉기로, 베로는 화염으로 각각 적을 공격한다. 이 영화는 원작의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요괴와 요괴보다 더 사악한 인간’이라는 아이러닉한 주제를 여전히 잇고 있다. 드라코는 인류 중 엘리트들이 모여 일하는 곳. 겉으로야 인류의 질병을 고쳐 주고, 생명을 연장시켜 준다지만 사실은 이익이 최우선이다.

그래서 최고의 피지컬을 지닌 벰을 체포해 기억을 지우고, 조작한 기억을 심어 놓고 매일 약을 먹이며 조종하고 있다. 그의 DNA를 추출해 강력한 요괴를 창조, 군대를 거느리고 사실상 세계 정복을 꿈꾸고 있는 것. 베가가 수장인 ‘보이지 않는 의회’는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 등 사실상 세계의 헤게모니를 쥔 집단을 뜻한다.

‘인간적’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적인 성질이 있는’과 ‘양심적’, ‘윤리적’이다. 양심적이고 윤리적이라는 것은 착하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성질에는 선과 악, 냉과 온 등의 이항대립이 공존한다. 그래서 인간적이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헷갈리기는 하지만 사전적 풀이를 근거로 할 때 신이나 동물과 다르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즉 신만큼 전지전능하다거나 오로지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지는 못할지언정 동물처럼 본능만 추구한다거나 극도로 이기적이지는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간적이라는 건 인도주의적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드라코 대표와 임원들은 계산법에서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타자와의 관계에서 무조건 배타적이다. 그들이 곧 자본주의이다.

요괴인간을 보라. 베라는 정체를 숨기고 ‘인간 놀이’를 하며 산다. 지난 2년 동안 단 한 번도 변신한 적이 없다. 대다수 인간의 위선과 가식을 의미한다. 베로는 아무런 이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사람을 구하는 게 지천명이라 여기며 살고 있다. 벰은 아예 자아를 잃어버린 채 인간을 위한 마루타로서 살아가고 있다.

이 영화가 묻는 ‘무엇이 인간적인가?’와 ‘자아란 무엇인가?’이다. 주인을 기다리며 수개월, 아니 수년째 한 곳을 서성대는 유기견. 심지어 주인을 구해 주는 충견까지 우리는 정말 감동적인 동물의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접하고는 한다. 그뿐만 아니라 ‘저게 인간인가?’ 싶을 만큼 천인공노할 괴물 이야기도 그만큼 쉽게 보고 듣는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고 꽤 어려운 이야기를 했는데 골자는 결국 신의 경지에 이를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동물처럼 나락으로 떨어지지도 않는, 인간적인 인간을 말한다. 그래서 ‘신을 죽이고’(믿거나 기대지 말고) 위버멘시(극복인)를 추구하는 것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추악해서는 안 된다.

현대 일상적 철학의 출발점은 대개 ‘나는 누구인가? 또 여기는 어디인가?’이다. ‘나는 어디서, 왜 이리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여기는 어디이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아마 죽기 직전에야 깨닫지 않을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현실 버전이다. 이 영화에서 리사이클과 베가를 제외하면 모두 비주체적 존재자이다.

조직(자본주의)을 위해 구조주의의 한 축을 이룰 뿐 자아는 없다. 그래서 리사이클과 베가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각 개체가 자아를 찾는 것. 그런데 실존주의에서 자아 정립은 기본이자 필수이다. 각각의 개체는 세상에 피투된다. 제 의지로 탄생하는 게 아니라 자연의 섭리, 혹은 부모의 관계, 혹은 신의 창조에 의해 태어난다.

세 요괴는 자의로 세상에 나왔다. 실존주의가 피투에서 기투(스스로 세상에 나아감)로의 발전을 꾀하는데 3명은 처음부터 기투한 것이다. 과연 그들이 인간이 될지는 중요하지 않다. 처음부터 인간적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메타휴먼의 진화적 모습까지 보였으니까. 살짝 ‘매트릭스’의 메시지까지 담은 영리한 애니메이션이다. 16일 개봉.

[유진모 칼럼 / 사진=영화 포스터,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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