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지하도시에 깃든 온기… 뮤지컬 '이끼숲'이 건네는 삶의 이유[리뷰]
입력 2026. 11.05. 16:13:43

'이끼숲'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세상이 무너진 뒤에도 사람들은 서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자연마저 사라지고 모든 것이 통제되는 세계에서 누군가와 함께 미래를 꿈꾼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뮤지컬 '이끼숲'은 2023년에 출간된 천선란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지상이 멸망한 후 지하 도시로 추방되어 통제된 삶을 살고 있는 인물들이 서로의 고통을 보듬어가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감성적이고 섬세하게 풀어냈다.

기후 위기로 지상이 멸망한 이후, 인류는 지하도시에서 통제된 삶을 살아간다. 통제와 감시가 일상화된 공간 속에서 청년 마르코, 소마, 의주, 유오는 저마다의 꿈을 품고 살아간다. 네 사람은 인공 별로 가득 채워진 '스페이스 스카이'를 보며 언젠가 함께 지상으로 나가 별을 보자는 약속을 나누기도 한다.

그러던 중 유오가 작업 중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친구들은 큰 충격에 빠진다. 각자 힘겨운 현실 속에서 버티던 이들은 결국 서로를 구하기 위해 익숙한 세계를 벗어나기로 결심한다.



'이끼숲'이 흥미로운 지점은 디스토피아라는 장르적 배경과 이야기의 정서가 사뭇 다르다는 데 있다. 작품이 그리는 세계는 어둡고 암울하다. 지상은 더 이상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공간이 됐고, 지하도시에서는 효율과 규칙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의 삶이 통제된다. 그러나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마냥 절망적이진 않다. 오히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서로를 위하고, 함께 살아갈 미래를 꿈꾸는 인물들의 모습은 작품에 따뜻한 온기를 더한다.

원작 소설 '이끼숲'은 '바다눈', '우주늪', '이끼숲' 세 편으로 구성된 연작이다. 뮤지컬은 이 세 이야기를 하나의 서사로 엮어 무대 위에 펼쳐내며, 이 과정에서 일부 사건과 설정이 생략되거나 각색되기도 했다.

다만 이는 공연의 특성을 고려하면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하다. 소설이 충분한 시간을 들여 세계관을 구축하고 인물의 내면과 관계를 세밀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공연은 제한된 시간 동안 관객에게 이야기의 흐름과 핵심 정서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관객에게 지하도시의 설정부터 설명해야 하는 만큼, 초반부에는 세계관을 구축하는 데 상당한 비중을 할애한다. 그 결과 인물들이 서로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연대하게 된 배경이나 관계의 깊이가 원작만큼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는 아쉬움도 조금 남는다.

그럼에도 원작을 읽고 나면 뮤지컬이 세 이야기에서 핵심적인 요소들을 선별해 하나의 흐름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원작보다 인물의 수를 줄이고 각각의 서사를 압축했지만, 그 안에서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정서와 주요한 사건들은 비교적 충실하게 담아냈다.



무대 연출은 작품의 세계관을 구현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극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무대 위 대형 스크린이다. 극이 진행되기 전부터 스크린에는 지하도시의 모습과 각종 영상이 끊임없이 펼쳐지고, 차갑고 거친 파이프 구조물을 활용한 무대 세트는 공간 전체에 삭막한 분위기를 더한다. 자연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대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황폐함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시각적 장치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지하도시에 실제로 들어와 있는 듯한 감각을 만들어내며, 인물들이 처한 환경을 자연스럽게 체감하도록 돕는다. 특히 지상이 사라진 세계라는 설정은 자칫 추상적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무대의 질감과 영상, 조명이 어우러지면서 작품 특유의 디스토피아적 분위기가 구체적으로 구현된다.

음악 역시 극의 정서를 뒷받침한다. 작품 전반에는 록을 기반으로 한 강렬한 비트와 서정적인 선율이 함께 배치되어 있다. 극의 긴장감과 인물들의 절박한 감정을 드러내는 넘버들이 있는가 하면,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그리는 곡들은 한층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어두운 정서에만 머무르지 않고 인물들의 감정 변화에 따라 음악적 분위기를 달리하며 서사의 흐름을 채운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끼숲'이 이야기하는 것은 미래 사회의 참혹한 모습만이 아니다. 작품 속 지하도시는 기후 위기와 환경 파괴가 초래한 결과이지만, 그 안에서 작동하는 규칙과 통제 방식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생존과 효율이라는 명분 아래 개인의 삶을 통제하고, 사회가 정한 기준에 따라 누군가의 가치를 판단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노동과 생명의 가치를 누가 결정하는지, 공동체의 유지라는 이유로 개인의 희생을 어디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 역시 작품 속에서만 국한되지 않는다.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는 오히려 현재 우리가 마주한 현실을 비추는 거울처럼 기능한다.

그렇기에 인물들의 선택은 단순히 지하도시를 벗어나기 위한 모험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이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통제된 세계가 정해놓은 규칙에 순응하는 대신 서로를 믿고 함께 나아가려는 이들의 모습은 작품에 저항과 연대라는 의미를 더한다.

무엇보다 '이끼숲'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 되어준다는 점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각자 상실과 고통을 안고 살아가지만 서로를 외면하지 않는다.

숲과 별을 보겠다는 이들의 약속 역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연이 사라진 세계에서 숲과 별은 단순히 되찾아야 할 풍경이 아니다.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이자, 언젠가 그곳에 함께 도달하겠다는 희망이다. 어쩌면 이 약속은 단순히 숲과 별을 보러 가자는 말보다 "함께 살아 나가자"는 다짐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확신도 없고, 앞으로 나아갈 길이 언제나 분명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겠다는 마음, 서로에게 계속해서 살아갈 이유가 되어주는 관계가 있다면 우리는 다시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셀럽미디어 정원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라이브커넥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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